[독서일기] 길을 걸었다. 행복했다.
2017년 10월 21일 토요일
아내와 걸었다. 어느 날 우린 낯선 한 동네를 발견했다. 큰 돌의 뜻을 가진 대석마을이다.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8년 전쯤에 한 번 이 마을을 지나친 적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 대석마을을 찾았다. 한 번은 그냥 지나치고, 한 번은 홍룡사를 가기 위해 그 마을을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마을 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마을 골목길을 걸었다.
"우리 걸을까?"
"응"
한적한 마을, 추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들녘은 황금물결에 춤을 춘다. 스스슥, 바람이 불면 들려오는 벼 이삭들의 의태어이다. 골목은 그리 넓지 않다. 겉보기에 화려하던 마을 풍경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흙담, 담쟁이넝쿨, 감나무, 고양이, 작은 텃밭들. 우린 그렇게 오래된 낯선 풍경에 마음을 주었다. 한 시간을 소곳한 발걸음으로 골목길을 돌고 나니 분주한 마음도 가라앉고 상한 마음도 치유가 된다. 걷는 것은 작은 기적이다.
오늘 한 권의 책을 읽는다. 황용필의 <걷기 속 인문학>, 제목에 벌써 마음이 끌린다. '걷는다는 것, 그리고 걷기와 인문학의 접점, 그 무엇이 이 책에 펼쳐질 것을 기대하니 출간 소식이 들릴 때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황용필, 길이 좋아 걷다가 매일 1만 보를 순례한단다. 매일 말이다. 매달 아름다운 사람들과 별 헤는 밤길을 걷는다는 이야기에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에 걸어 들어온다.
첫 장에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나온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처음 이 수수께끼를 접했을 때가 아마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난 답을 맞히지 못했다. 아침과 낮과 밤을 실제의 하루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아침은 어릴 때를, 낮은 젊었을 때를, 그리고 밤은 노년을 말한다. 결국 청년기를 지나고 우연히 접한 어느 책에서 이 수수께끼를 다시 읽고 맞추었다.
걷기는 사람의 본성이다. 걷지 않는 인간은 죽는다. 그것은 본성이고, 생존 방식이며, 삶의 양태이다. '태초에 걷기가 있었다'는 기이한 주장에 다시 혀를 내둘린다. 성령의 운행, 즉 하나님의 걷기다. 에녹의 동행을 다시 걷기로 확장시키는 저자의 통찰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렇다. 그는 걷는다. 아니 믿음의 사람은 걷는다. 걷기는 삶이고, 사유 방식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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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빛에 물든 구기자는 붉다. 빨강은 지독한 자기애다. 그런데 구기자의 빨강은 겸손함이다. 남 너머 내려오는 가는 줄기가 가는 이의 발목을 붙잡는다. 담은 높지 않다. 사람 목에 걸린다. 고개를 살짝 들면 집 마당이 보이고, 허리 아픈 할매의 바쁜 손길이 보인다. 지나가다 물었다.
"할머니 허리가 많이 아프시죠?"
낯선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잠시 한 번 입을 여시니 한참을 말씀하신다.
"건강하세요."
다시 우리는 걸었다. 걷는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 이상이다. 고속도로에서 차들끼리 대화하지 않는다. 풍경은 사라지고 가야 할 목적지만 속도로 표시된다. '3인칭 소설의 주제 같은 곳'(111)이 되어버린 고향이라지만, 그래도 아직 변하지 않는 곳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걷기는 쓸쓸하다. 그러나 사유는 확장되고, 풍경은 향유된다. 걷지 않으면 자연을 향유할 수 없다. 심신의 즐거움은 걷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걷지 않으면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운전사들은 심장마비로 급사할 확율이 잘 걷는 사람의 수십 배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걷는 존재로 지으셨다.
걷다가 발길을 멈추었다. 고양이를 보았다.
"야옹야옹"
아내가 고양이를 부르는 소리다. 아내는 자신이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심 많은 고양이는 아내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는다. 사람을 안다는 말이다. 좀 더 걸으니 고양이가 무리를 이루었다. 아내는 다시 주저앉아 말을 건넨다. 이번엔 고양이들이 경계의 눈빛만 줄 뿐 도망가지 않는다. 걷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걸으면서 정답게 말할 수 있고,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지난주, 마음이 아플 때 아내와 나는 걸었다. 그때는 잘 몰랐다. 왜 걷는지. 단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걷기는 치유이고, 행복이며, 삶의 본질임을 배운다. 그래 자주 걷자. 행복해질 것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덧 해가 기운다. 우린 오늘도 걸었다.
2017/10/14 - [일상이야기/여행일기] - [일상]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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