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성 [긍휼 예수님의 심장]
긍휼 예수님의 심장
하재성 / SFC, 2014.12.03
읽다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책이 있다. 손이 부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려 안절부절 못한다. 두 종류의 책이 그렇다. 독자를 깔아뭉개는 독설가의 책이거나, 공감과 감동을 주는 책이거나. 하재성의 책은 후자다. 읽어가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몇 안 되는 책이다. 이 책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19세기 프랑스의 인문학자였던 에밀 파게는 이렇게 말한다.
“감동이란 작가가 작품 속 등장인물에게 내맡긴 감정을 독자와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감염으로, 우리가 창조된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정신 상태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단단한 독서 中)
그렇다. 감동(感動)은 감염(感染)이다. 독자의 감정이 작가의 감정에 전염되어 동치현상(同値現狀). 감염이 치명적인 이유는 감염자와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창조적 감염도 존재 하는데, 슬픔이 아닌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동일한 감정의 운명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감동이다. 이곳에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우리만 있다. 감동(感動)의 한자어 뜻을 보면 마음에 닿아 움직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공감(共感)이라고 한다면, 감동(感動)은 행동하게 한다. 성경적 용어를 가지고 설명한다면 긍휼(矜恤)이라고 말한다. 긍휼의 긍(矜)은 괴로워한다는 뜻이 있고, 휼(恤)은 마음에 피가 통한다는 뜻이다. 마음으로 괴로워 견딜 수 없어 행동하고 마는 것이다. 하재성은 예수님의 심장을 긍휼로 표현했는데, 인류의 고통을 보고 견딜 수 없어하는 예수님 마음이다.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 긍휼 덩어리, 긍휼 공장이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실 때도 마찬가지다. 굶주려 쓰러지려 할 때, 혹은 병이 들었을 때, 심장이 피를 뿜어내듯 주님의 긍휼이 생산되는 것이다.” p30
타락 이후, 인간은 고립되었고 독단적이 되었다. 공감능력은 현저히 낮아지고 공격적이고 신날하게 타자를 고립시켰다. 창세기 3장에서 발견된 아담에서 창세기 2장에서 최상급 용어로 아내를 칭찬하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다. 오래 전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하여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라고 꼬집었다. 긍휼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온 수단화되고 경쟁의 대상으로 타자화시킨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전제(前提)다. 긍휼은 예수께서 행한 ‘기적의 목적’이며, 고통과 비판 받음의 원인이셨고, 십자가를 진 이유이다.
깊이를 떠나 내용면에 있어서 독보적인 책이다. 지금까지 예수의 긍휼에 대해 다룬 책은 몇 권 있었지만, 신학과 심리학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긍휼을 논한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지금까지 긍휼에 대해 국내에 소개된 책이 있다면 2002년 헨리 나우웬 등이 공저한 <긍휼>(IVP)이 있고, 차준희의 <열두 예언자의 영성>에서 잠깐 긍휼을 다룬 것 외에는 거의 전무하다. 3부 14장으로 구분해 차근차근 풀어 나간다. 논리적 체계를 갖추었다고 보다 ‘복음서에 기록된 ... 주님의 이야기들을 긍휼의 돋보기로 들여다 본’ 것이며, ‘선별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예수님의 긍휼이 넘치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7쪽)
긍휼이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예수의 생애. 신선하면서도 정확하게 짚어 냈다고 확신한다. 책은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곳을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어느 곳에서도 예수의 긍휼의 심장 소리는 들린다. 저자가 찾아낸 예수의 심장소리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 속에 있다. 서두에서 풀어낸 여리고성에서 만나 두 시각장애인과의 만남에서 예수의 관점과 제자들의 관점이 어떻게 다른가를 주목한다. 예수와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두 맹인이 긍휼히 여겨달라고 외친다. 두 맹인의 소리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제자들에게는 ‘성가신 소음’(16쪽)이자, ‘시야에서 빨리 사라지면 좋을 장애물’(18쪽)이었지만, 예수는 긍휼의 대상이셨다.
예수의 귀와 눈
칵테일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시끄러운 파티 현장에서도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선명하게 알아듣는 것을 말한다. 유치원에서 여러 명의 아이울음소리가 들려도 엄마는 자신의 아이 목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낸다. 예수는 왁자지껄한 무리의 소리에서 자신에게 긍휼을 구하는 외침을 정확하게 분간하셨고, 그들을 고쳐 주셨다. 나인성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장례식의 화려함을 볼 것이고, 어떤 이들은 장례행렬의 크기를 볼 것이고, 어떤 이들은 또 다른 풍경을 볼 것이다. 주님은 오직 한 곳을 주목했다. 독자를 잃은 과부를 보았다. 장례행렬의 핵심이자 절대절망의 심원에서 고통 하는 과부를 본 것이다.
“모두가 죽음을 응시하며 슬픔에 잠겨있는 이 엄숙하고 긴 장례 행렬을 만났을 때, 생명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딱 한 곳을 바라보셨다. 예수님의 마음과 시선은 눈을 어지럽히는 장례행렬의 화려한 외관에도 헤매지 않았다. 그분의 시야와 마음은 딱 한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 장례 행렬에서 가장 마음이 슬픈 한 사람, 가장 깊은 신음을 안고 있는 바로 그 사람! ... 바로 그 과부를 보고 계셨다.”(56-57쪽)
CCM 중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 이 가사처럼 예수의 긍휼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긍휼, 분노하게 하다.
감동(感動)은 행동을 유발 시킨다고 했다. 예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분노했다. 안식일에 18년 된 여인이 들어왔다. 예수는 곧바로 그녀는 주목했고, 그녀를 고쳐 주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했다. ‘치료는 무효이며, 범법이며, 모든 기쁨과 환호성은 무가치하다고 정죄’(158쪽) 당했다. 그의 주장은 논리 타당해 보인다. 치료 받고 싶으면 다른 엿새가 있지 않느냐. 왜 하필이면 안식이냐? 기쁨과 환호를 외치던 회중들과, 18년의 고통에서 벗어난 여인의 기쁨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내 정말 잘못한 것일까? 사람들도 여인도 자책한다. 그러자 예수는 분노한다. “이 가식자들아, 너희는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하물며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어 안식이라고 풀어주면 안 된다는 말이냐.”
예수는 행동했다. 추상같은 권위로 가식자들을 책망하는 동시에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들을 지켜 주었다. 주님의 분노는 죽음의 길을 재촉했고, 십자가에서 결국 긍휼의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아냈다. 저자가 마지막 장을 장식하면서 ‘감사’를 언급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감사는 기억이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확증이기 때문이다. 이 서평도 ‘감사’로 마친다. 하재성 목사님께 감사한다. 참 좋은 책 써 주어서. 예수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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