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지난주 금요일 수능 다음날인 11월 11일은 무슨 날일까요? 빼빼로 데이입니까? 그날은 혹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년에 한 번 있는 날이라고 합니다. 2011년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 위대한 탄생의 시기라고 생각해서 아직 출생한 날도 아닌데 제왕절개를 한 어머니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탄생은 육체적 관계를 통해 일어난다. 만약 자녀가 없으면 대가 끊긴다. 조선시대는 이러한 대가 끊기는 방지하기 위해 씨받이를 돈으로 사기도 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일 것입니다. 인류는 현재 대두된 문제를 해결하기 방법들을 찾습니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청년실업의 문제, 급속한 노령화에 이에 따른 부양비의 증가, 보수진보간의 갈등, 무너져가는 공교육의 문제 등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이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또한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입니다. 먹어야하고, 입어야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문제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이러한 문제들과 분리되어 살 수 없습니다. 기독교도인도 세상에 살고 있으며, 세상의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거대한 인류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또한 그 틈바구니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요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역사적 거대담론입니다. 족장시대와 애굽의 노예시절, 모세를 통한 출애굽시절과 앗수르와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시대, 그리고 로마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장장 1500년의 이야기가 몇 절의 간단한 족보에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나라가 생기기도하고 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탄생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역사는 흐리고 흘러 지금 이곳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H. 카의 명제를 인용하지 않더라고, 우리는 과거로부터 왔으며,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역사 속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음모와 술수도 있고, 사랑과 이별 이야기도 있고, 우정과 배신도 있고, 탄생과 죽음의 이중주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족보는 우리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과학(열역학)의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 중 앞의 두 개는 우리가 기억할 만한 가장 중요한 법칙입니다. 하나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무질서도의 증가입니다. 열역학 제1법칙인 질량보존의 법칙-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며, 줄지도 늘어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의 방향을 말하는 것으로, 에너지는 사용하면 할수록 엔트로피라 불리는 무질도가 증가하는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질서도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에너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가 쓸 수 없는 에너지는 계속하여 증가하며 결국에는 에너지는 있으나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는 없어지기 때문에 우주가 통째로 파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현대 기계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는 효율이 좋은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차를 생각해 봅시다. 차에다 100이라는 기름을 넣었다면 그것이 달리는 데 100이라는 운동 에너지로 변화되어야 효율 100%의 자동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동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찰 에너지로, 열에너지로, 공기 저항으로 인한 알 수 없는 다른 에너지로 변화되고 맙니다. 열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운동 에너지가 다시 열에너지로 변화되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계속하여 발생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여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우주를 멸망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자들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공부만 하더라도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가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구가 멸망하고 있다면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또 다른 이론을 만들어 지구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깁니다. 에너지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면, 정말 그랬다면 말입니다. 처음 에너지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요? 우연하게 생긴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요? 고대 헬라철학자들 중에서 생성과 존재에 관하여 고민했던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그들을 자연철학자들로 부릅니다. 철학의 가장 초기 형태로 우주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들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밀레토스에 살았던 고대의 지식혁명을 일으켰던 탈레스는 무든 것의 본질을 '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였던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말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의 분질은 '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엠페도클레스는 '불' '물' '공기' '흙'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에 가장 가까운 주장을 했던 데모크리토스는 우주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이것을 '원자'라고 명명했습니다.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이론은 이후로 철학사와 과학사에서 사라졌다가 1807년 화학자인 돌턴에 의해 다시 재기 되었습니다. 그는 '만물을 쪼개면 더는 쪼갤 수 없는 알갱이가 된다'고 말하면서 원자의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증명할 만한 기술이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론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1904년 톰슨이란 과학자가 입자와 미립자라는 전자의 개념을 제시했고, 결국 그의 제자인 러드퍼드는 알파선의 산란실험을 통해 원자가 실제로 존재함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고민은 단순한 원자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이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생각해 봅시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진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정말 이상합니다. 학문적으로 반박이 불가능해 보이는 훌륭한 논리와 여러 화석들을 증거로 제시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것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시골에 살면서 보았던 몇 장면은 이렇습니다. 송아지는 사람처럼 10달이 되어야 새끼를 낳습니다. 그런데 송아지가 걷고 뛰어 나는데 드는 시간은 다시 10달이 아닙니다. 불과 30분이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보십시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이들은 먼저 알아차리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갑니다. 2004년 동남아에 쓰나미가 닥쳐 올 때 어느 부족은 짐승들이 갑자가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따라 올라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 종족에게는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동물들이 평상시와 다르게 산으로 도망가면 빨리 같이 도망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진화해서 이곳까지 온 것 맞나요? 사자보다 약해, 독수리처럼 날지도 못해, 두더지 처럼 땅굴도 파지 못해, 개처럼 후각이나 청각도 현저히 떨어져.. 도대체 만물의 영장이란 별명은 도대체 누가 붙인 것입니까? 우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의 미아가 아닐까요? 헤밍웨이가 썼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소설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건 작적이었지만 결국 아무런 소용도 없는 무의미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일반적인 탄생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즉 남녀가 성관계를 통해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된 육신적 탄생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잉태된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조작된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심지어 많은 신학자라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연법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대안은 예수님은 마리아의 간음을 통해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이것을 알고 마리아과 파혼을 하려고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 속에는 기적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어쩌면 기적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 앉은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본능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믿지 못하는 강력한 본성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일 40억을 갚지 못하면 회사가 부도가 납니다. 그것을 위해서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40억이라는 거대한 돈이 생길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냥 답답하니까 기도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다음날 새벽에 집을 향해 가는데 어떤 이상한 노인이 와서 돈에 무엇인가를 집어 주었습니다. 별 이상한 사람이 다있네 하고 뭔가 싶어 봉투를 열어보니 그곳에 40억짜리 수표가 들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74년부터 77년까지 3년에 걸쳐 미국은 가뭄과 심한 메뚜기떼로 인해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공황에 빠져들었습니다. 1877년 4월 27일 주지사 필스베리스씨는 모든 주민들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하는 날을 선포했습니다. 농작물은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 살아있고 앞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것이니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미네소타 주민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일어났다. 며칠 만에 메뚜기 떼가 모두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야 말로 가장 큰 기적 중의 하나입니다. 애써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거부하려는 마귀적 속임수에 넘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 말한 지성인들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이 내놓은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의 엔트로피의 증가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적인 어떤 존재가 없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 기적이며,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게 하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처음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하나님은 예수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 창조적 능력으로 행사하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은 나라의 시작은 바로 이 '기적'에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일단의 병사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인 지금의 프랑스 골 지방에 있는 '루비콘 강'을 건넜습니다. 루비콘 강은 그다지 크지도 않고 건거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건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건널 수 있는 작은 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 강을 건넌다는 것은 로마에 전쟁선포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해 보이는 작은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로마의 역사를 새로 쓰고 말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필역의 역사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에 깊게 드리워진 죽음을 운명을 전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득한 태고적 약속인 뱀은 여자의 후손의 뒷발꿈치를 물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짓밟아 버리겠다는 바로 그 약속의 시작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더 이상 소망 없는 체로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각오이자, 장엄한 선포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십시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역사는 수많은 전통과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 왔습니다. 또한 과학과 문명은 끊임없이 발달해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고 있으며, 세상은 더 타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기소설인 '상록수'에는 미개한 조선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깨우쳐 주면 위대한 조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며, 문맹 율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 진정 복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갈수록 악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욱더 소외되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17-19세기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다음 시대를 위대한 세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미개한 족속은 문명화 될 것이고, 의료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지구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은 없어질 것이라고 장담했으며, 모든 나라가 완전한 민주주의와 더불어 인간승리를 이룩할 것으로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싹쓸이 뭉게 버렸고, 사람들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이며, 인류가 자랑하는 역사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거짓되고 가식적인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법칙을 통해 들어오시지 않고 새창조적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베들레헴의 작은 무명의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알래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얼굴을 엿보다'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백성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고통과 슬픔을 맛보지 않아도 될 신적 특권을 한쪽으로 물려 놓고서 그들의 세상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어깨에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처럼 고통당할 필요가 없는 분이었으나 스스로 세상의 고통을 자기 어깨에 짊어지기로 선택하셨다."(124쪽)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어리석을 인간을 향한 애타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수많은 탄생이 지구상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없이는 인류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는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지금 진행되고 있으며 계속하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임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신평로교회, 주일 저녁 설교 2011년 11월 13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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