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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롬 2:26-29 할례 보다 순종이 낫다

샤마임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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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새겨진 율법과 참된 유대인 (롬 2:26-29)

무할례자의 순종은 할례보다 낫습니다 (2:26)

바울은 로마서 2장 후반부에서 유대인의 특권의식과 외적 표징에 대한 자만을 철저히 무너뜨립니다. 26절에서 그는 충격적인 가정을 던집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수 있지 아니하냐?”(2:26). 여기서 '무할례자'(ἀκροβυστία, 아크로뷔스티아)는 이방인을 지칭하는 상징적 표현이며, 단지 육체적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언약 밖의 존재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방인이 율법의 본질적 요구를 '행한다면'(φυλάσσῃ, 퓔라쎄이), 하나님께서 그의 무할례를 할례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외적 표징보다 내면의 실천이 훨씬 본질적임을 말하는 복음적 선언입니다.

바울의 이 말씀은 단순히 율법적 행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외형적 순종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정신, 곧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실제로 율법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삶에서 무시하는 자보다, 율법이 없어도 본성적으로 그 뜻을 따르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율법 자체보다 율법의 목적, 곧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에 대한 응답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가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가로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세례, 교회 출석, 직분 등은 복음의 표징일 수 있으나, 그것이 우리의 내면과 분리되어 있다면 오히려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율법 소유보다 내면의 순종이 진정한 율법 준수입니다 (2:27)

바울은 27절에서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육적으로 할례를 받은 자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또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27). 이 말씀은 단지 비교의 논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유대인의 영적 교만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외적 기준이 아닌 실제 행위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임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정죄하다'(κρίνει, 크리네이)는 단지 판단하거나 비판한다는 뜻을 넘어서, 법정에서 심판을 내리는 공식적인 선언의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순종이 유대인의 불순종을 심판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음을 밝히며,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철저히 공의롭고 일관성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자가 믿음의 본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이제 막 믿음을 갖기 시작한 이들이 더 진실한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이 가르침은 신앙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려는 모든 이에게 깊은 경고입니다. 율법을 가졌다는 것, 말씀을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에서 실천되고 있는가, 마음에 새겨져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만이나 특권의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라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백성입니다.

참 유대인과 마음의 할례 (2:28-29)

바울은 이제 이 주제의 정점을 찍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28). 그는 '표면적'(ἐν τῷ φανερῷ, 엔 토 파네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외형적으로 보이는 정체성과 참된 정체성을 구분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자부심과 율법, 할례 등의 외형적 표징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9절은 이에 대한 참된 정의를 제시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기서 '이면적'(ἐν τῷ κρυπτῷ, 엔 토 크뤕토)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께 드러나는 내면을 뜻합니다. 할례도 '마음에' 있어야 하며, 이는 단지 외적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내적 변화입니다.

바울은 '영에 있고'(ἐν πνεύματι, 엔 프뉴마티)라고 말하며, 이 할례가 성령의 사역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구약 예언자들이 이미 외쳤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30:6에서 하나님은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4:4에서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는 새로운 복음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원하셨던 언약 백성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마무리 선언이 이어집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 말씀은 헬라어 'ἔπαινος'(에파이노스)를 사용하여, 진정한 평가는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겉으로 종교적인 열심과 외적 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눈만 의식한 것이라면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며, 마음의 진실함을 보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 앞에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신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제자입니까? 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합당한 자가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유대인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결론

진정한 신자의 정체성은 외적 표징이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새겨진 할례에 있습니다. 율법의 조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내면의 순종이며, 진정한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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