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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묵상] 4월 5일(일) 마태복음 21:1-11 겸손의 왕이 오시도다

샤마임 2020.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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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일)

마태복음 21:1-11
겸손의 왕이 오시도다

 

[본문 읽기]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말씀 묵상]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아무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따르는 주님이 5일 후에 죽는다는 것을. 아니 그들은 이미 세 번에 걸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오직 곧 임할 새로운 나라와 높은 지위를 생각하며 김치국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으신 그 걸음은 그동안 선지자들이 피를 통하며 예언하고, 목마르게 기다리던 그 걸음이었다. 이제 곧 주님의 발자국은 핏자국으로 흥건할 것이며, 어둠과 악한 영들이 지배했던 죽음 시대를 끝내기 위해 주님의 손은 못이 박히고, 주님의 옆구리를 짱에 찔려 물과 피를 흘릴 것입니다. 그 고통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주님은 환영 받아야하고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로 환영 받으셔야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선지자 예수

주님께서 도착하신 곳은 감람 산에 있는 마을 벳바게였습니다. 벳바게는 ‘무화과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고, 무화과로 끼니를 때우는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주님은 이곳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 새끼를 끌로 오라 하십니다. 맞은편 마을은 아마도 베다니 마을로 보입니다. 베다니 마을은 막달라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던 곳으로 몸에 병이 있는 자들이 정결법을 위해 대기하는 쉼터이자 환자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지만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이 사는 곳, 그곳이 발로 벳바게와 베다니의 정체성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풀어 가져오라 하십니다. 나귀의 주인은 기꺼이 허락합니다. 마태는 즉각적으로 이 사건이 스가랴 9:9에서 암시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온은 성전이 세워진 장소이며,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평화의 통치를 상징하는 명칭이라면 시온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구속사적 명칭입니다. ‘시온의 딸’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처녀처럼) 순결한(거룩한)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네 왕’, 즉 예루살렘의 왕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겸손하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들은 종려나무를 꺾어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합니다. 이것을 바라본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렇게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아함 속에는 마카비 시대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헬라시대, 에피파네스라는 대왕이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성전을 모독할 때 마카비 가문이 혁명을 일으켜 성전을 회복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다시 성전을 회복했기 때문에 기쁨을 이루형언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듯 전쟁에서 이기로 돌아온 마카비 가문의 군사들을 환영하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카비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지금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며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생각할까요? 마태는 그들이 ‘선지자 예수’(11절)로 소개했음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주님은 환영하면서도 전혀 주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새끼 나귀를 타시고

주님은 나귀를 타십니다. 그 나귀는 어미가 있는 새끼 나귀입니다. 아직 어미의 품을 떠나지 않은 새끼입니다. 또한 단 한 번도 등에 짐이나 사람을 태운 적이 없습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새끼 나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나귀에 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간과합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나귀는 사람을 태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등에 타시자 나귀는 앞으로 향하여 걸어갑니다. 수많은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나귀를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고, 아직 훈련되지 않았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타시니 주님의 뜻대로 사용됩니다.

예루살렘은 죽음의 도시입니다. 주님은 점점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며 주님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환영을 받고 계시지만 속으로 울고 계시는 주님의 슬픔을 읽어야 합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환영하지만 주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철저히 철들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나가면서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의 육신의 평안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과 속죄를 허락하시기 위하여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계가 아파합니다. 우리 역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손가락에 작은 가시는 아파하면서 이웃의 큰 아픔은 망각합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가 봅시다. 주님의 아픔, 주님의 고통, 주님의 슬픔, 주님의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결단기도

* 주님! 나의 눈을 열어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 주님께서 바라보는 곳을 나도 보게 하시고, 주님께서 아파하신 것을 나도 아프게 하옵소서. 내 안에 주님을 온전히 채우는 한 주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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