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 박중서 옮김 / 청미래
“에덴과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선언이다. 에덴은 세상을 말하고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한다. 철저한 금욕주의자요 허무주의 성향이 강했다. 결국 말년에 기존의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금욕을 강조한 어떤 집단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교회는 세상과 완전한 결별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초대교회는 세상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기나긴 논쟁을 시작했다. 져스틴을 중심으로 한 분파는 극단적으로 세상으로 나갔다. 심지어 그는 헬라 철학자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하는 오류를 범한다. 터툴리안은 또 다른 극단에서 세상을 사탄의 나라로 규정하고 교회 안에서 세상을 완전히 몰아내려 했다. 세상과 교회는 얼마나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세상은 교회의 적인가 친구인가.
어거스틴은 댐이 되어 두 거대한 물줄기를 수용하고 융합(融合)하여 한 수문(水門)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신국’이다. 로마의 멸망으로 인해 일어난 기독교적 변증의 결과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와 세상에 대한 관계를 정리한 지침서이다. 핵심은 두 왕국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싸우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할 것을 선언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았고, 영적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상에 임했으며,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왕국론의 이해는 1200년이 흐른 뒤 루터에 의해 다시 재현된다. 그럼 세상은 영원한 적도 친구도 아닌 셈인가.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다. 그가 종교를 제안한다. 신자가 아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다. 가당키나 한 것일까. 무신론자는 무신(無信)이 아니던가. 그들을 위한 종교란 대체 무일까. 의아한 호기심이 일어난 읽기 시작해서 정신 줄을 놓고 빠져 들어갔다. 생각했던 난해한 철학적 담론이나 논쟁이 아니다. 평범하게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사소한 이야기다. 그러나 깊이가 꽤나 되어 빠지면 나오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종횡무진 풀어놓은 이야기에 넋을 읽을 수도 있다. 교회가 세상에 배타적이었다면 세상 역시 배타적이다. 타협점을 찾기 힘든 상황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종교의 가능성, 필요성, 효용성을 찾고자 한자. 무신론자가 오히려 종교를 변호하니 이 어찌 아이러니하지 않을까. 그가 옹호하는 종교, 종교의 필요성을 들어 보면 꽤나 공감이 간다.
저자는 인간이 대한 이해가 깊다. 지독한 보수주의자인 필자가 들어도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모두 열 개의 주제로 분류했다. 교리가 없는 지혜, 공동체, 친절, 교육, 자애, 비관주의, 관점, 미술, 건축, 제도. 비록 열 개의 주제로 분류했지만 결국은 첫 장과 마지막 장에서 통합한다. 종교를 통해 무신론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사뭇 진지한 그의 주장들은 적절한 근거와 논지로 무장하고 있다. 특히 역사와 철학, 심리학과 신학까지 아우르는 통섭적 인문학이 매력적이다. 필자가 보기에 어느 것 하나 허투르지 않다.
종교를 통해서 그가 뭘 얻으려 하는 것인지 들어보자. 첫 장은 ‘교리 없는 지혜’를 이야기 한다. 그렇다. 교리(敎理)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 진실한 종교는 물론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이 책은 기적, 영, 또는 불타는 덤불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11쪽) 초월적인 어떤 기적이나 신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12쪽)이다.
종교가 목적이 아닌 그 효능은 무신론자도 얻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믿음이 없어도 타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예수를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타적 사고로 종교를 버리지 말라는 당부를 먼저 한다. 뒤이어 나오는 다른 주제들은 종교의 적절성을 변호하면서 필요하다면 무신론자들도 종교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두 번째 주제인 공동체를 조금만 들여다보자. 현대 사회가 상실한 것 중에서 공동체 정신의 상실을 ‘가장 통렬하게 느낀’(23쪽)다. 시골에서 이웃끼리 더 친한 이유가 공동작업 때문이다.(26쪽) 공동체는 ‘장소를 이용해서 공동체 정신을 만’(31쪽)든다. 보통의 특이해 보이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부분은 후반부의 ‘제도’에서 더욱 내밀하고 파고 들어간다. 종교는 공간을 통한 모임과 제도 등을 통해 서로 엮어져 기존 사회가 채우지 못한 고독을 치유하는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미술을 통해 위안은 어떤가. 칼빈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장로교단 목사로서 미술은 곧잘 우상숭배를 연상 시킨다. 종교개혁 시기에 일어난 성상 파괴 운동은 십계명의 제2계명을 실천하는 혈혈 신자들과 충동질하는 지도자들의 소행이다. 미술의 경계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십자가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장로교 합동교단은 십자가를 예배당 안에서 추방시킨다. 보통은 미술을 통해서 위안과 평안이 올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
가톨릭은 미술을 통해 위안 뿐 아니라 종교적 교육과 신앙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사용했다. “미술은 악을 계속 새로운 형태로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악의 위력을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252쪽) 사진을 들여다보자. 처참한 장면을 담은 사진은 오금이 저리고 분노가 일어난다. 그러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아주고 싶은 동정심이 절로 난다. 미술의 힘을 간과할 필요도 거절할 이유도 없다.
무신론자가 먼저 종교에 팔을 벌린 셈이다. 일반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이기적이고 무식한 집단의 광기로 보는 것에 제동을 건다. 종교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라는 조언이다. 종교인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조언이다. 종교는 충분히 얻어낼 것들이 많다. ‘핵심은 …… 배후에 있는 목적을 우리가 부활시키고 지속시켜야 한다는 점이다.’(291쪽) 마지막에 세속 성전에 대한 저자의 꿈은 과대망상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것이 실현된 적도 없거니와 그런 류의 상상이 우스꽝스럽다. 신에 없는 종교, 무신론자들이 꿈꾸는 그런 종교다. 철저히 땅에 침전(沈澱)하고 집착한다.
종교인도 얻을 게 많은 책이다. 교리의 잣대로 판단하고 잘라낼 일이 아니다.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은 있다. 자연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무신론자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말씀과 기도로 잘 정화한다면 건져낼게 많은 책이다. 필자는 보통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볼 참이다. 무신론자가 보는 세상은 무엇인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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