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1. 3:4-9 놀라운 빅딜(big deal)
[빌립보서] 11. 3:4-9 놀라운 빅딜(big deal)
1. 성경 읽기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2. 묵상
빌립보서의 정점에 있는 본문입니다. 3:1-14는 바울의 자기고백적 권면인 동시에 빌립보서의 핵심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할 몇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은 바울의 신앙관에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로마시민이라는 명예를 자랑스러워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바울의 일침입니다.
1) 버려야 할 것들
세상 속에서 자랑스러운 것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σάρξ)’입니다. 육체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 본능을 따라가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 속에서 자랑할 만한 육체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바울은 앞서서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3절)라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몸에 하는 할례를 말합니다. 그들이 잘하는 것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육에 속한 표식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자랑에 바울 자신이 어떤 자랑거리가 있는지 밝힙니다. 자신의 육체 또한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에 비해 결코 뒤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자랑할 만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팔 일 만의 할례,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모두 일곱 가지를 제시합니다. 바울이 제시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종교적인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과 율법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지키는 특권을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혈통적인 것들이며,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매우 종교적이고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자랑은 ‘육체’를 따라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팔 일 만의 할례와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말은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로 다시 강조됩니다. 그럼 베냐민 지파는 어떻게 자랑 거리가 될까요? 제랄드 호돈은 베냐민 지파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이러한 말을 할 때 자랑의 기색을 역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베냐민 지파는 비록 작기는 했지만(시 68:27) 크게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① 그 지파의 선조는 야곱의 총애를 받던 아내 라헬에게서 난 두 아들중 동생이었다.
② 야곱의 모든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베냐민만이 약속의 땅에서 태어났다.
③ 이 지파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합법적인 왕이 탄생했다.(이 사도는 바로 그 왕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④ 성도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베냐민에 할당된 영토 내에 있었다.(삿 1:21)
⑤ 성도 에루살렘과 그 성정은 베냐민에게 할당된 영토 내에 계속해서 충성을 다했다.(왕상 12:21)
⑥ 포로기 이후 베냐민과 유다는 팔레스틴에 새로이 건설한 정착지의 핵심을 형성했다.
⑦ 베냐민 지파는 군대에서도 항상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했다. 그 때문에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는 전투 구호가 생겨났다.(삿 5:14, 호 5:8)
⑧ 부림점에 기념하는, 위대한 민족 해방을 가져다 준 모르드개도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다.(에 2:5)
⑨ 베냐민은 다른 지파들을 잠식하던 이교 문화에 저항해 '순수성'을 지켰다.
⑩ 베냐민에 대한 존경은 이상에서 인용한 것들 속에 암시되어 있는 것보다 한층 더 이른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⑦이 궁금해 본문을 찾아보았습니다.
삿 5: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번역이 모호합니다. 사사기에 소개되는 베냐민 지파는 전쟁의 용사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육체의 자랑으로 부르는 것들은 모두 구약에 속한 것이며, 혈통과 전통게 관련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적 전통에 대해 ‘육체에 속한 것’이며, 버려야할 것들이라고 과감하게 선언합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금까지 바울이 열거한 것들은 지금까지 바울을 있게 한 것들이며, 진정한 유대인으로서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긴다고 선언합니다. 제럴드 호돈은 ‘자산이 아닌 부채’와 ‘가치 재평가’라는 멋진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을 지금까지 있게 한 것은 육체적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세계에 대한 가치평가가 달라졌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랄드 호돈과 딕 루카스는 육체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연인의 상태’로 묘사합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했던 바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의 육체입니다. 겉으론 거룩하고 완전한 상태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에 불과하며 부활의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둠과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가장 큰 특권을 누리고,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열심이 있고 헌신되었다 해도, 그로 해서 하나님께 적절하고 받으실 만한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바울은 그저 그의 이점들과 업적들을 하나씩 더하고는, 총계가 0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딕 루카스는 탁월한 안목으로 바울을 그리스도 앞에 세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점수를 받았다 한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서는 제로(0)입니다. 사람의 그 어떤 노력과 수고도 자신을 구할 수 없으며 새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를 살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우리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0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100% 충만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익하던 것’(7절)뿐 아니라 ‘모든 것’(8절)까지 해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공간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가치관의 변화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법이 주장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입술로는 그리스도인으로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세상의 명예과 권력을 추구하며 시기하며 경쟁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의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자랑은 유대인들이 자랑삼은 것, 바울이 ‘배설물’(8절)처럼 여기는 것을 자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3)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9절부터 14절까지는 바울의 자기고적 신앙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합창해야할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8-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얻음
먼저 주목할 것은 ‘얻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으로 여겼던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해로 여기는 것들은 부와 명예와 같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저해하는 혈통적 유대인 됨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복음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들과 심지어 ‘모든 것’(8절)을 해로 여긴다고 선언합니다. 딕 루카스는 3:4-8절을 주해하면서 ‘이익과 손실’이란 주제로 멋지게 끌어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자랑하고 긍지를 가졌던 것들에 대해 ‘해’로 여기는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육체는 악이 아니라 ‘해’이며,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이제는 복음의 시대가 되었으니 당연히 버려야 합니다. 만약 날이 밝았음에도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본다면 낭비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또한 따뜻한 봄날이 왔음에도 여전히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다면 더워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의 시대에 육체의 것을 여전히 자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실체를 버리고 모형을 소유하려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것들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도록 지도합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것들을 버리라고 종용(慫慂)합니다. 왜일까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본 절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이 부요하게 되어지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축복이 되신다고 한다. 이미 말한 대로 모든 것들을 잃는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것들을 잃는 길을 통해서만’이란 구절에 유의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물질, 시간, 열정,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몽땅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로 채워야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부가 변화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변화되고,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길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값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기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음에 대한 좀 더 명쾌하고 신학적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되는 것’입니다. 분명 그리스도를 우리가 소유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우리가 그의 안에서, 즉 그의 소유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가 됩니다. 바울은 그 때, 자신이 ‘그 안에서 발견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존 칼빈은 이 구절이 ‘수동형’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발견되어질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첨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안에 강한 의지가 들어있음을 보여주는 문맥을 주의깊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있다. 만약 수동형으로 읽는다면 그 반대의 경우, 즉 바울이 자기 부요함을 등에 지고 있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마치 부자 상인이 자기 재산 중 어떤 하나를 잃어버린 경우처럼,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단지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야 한다. ... 그러므로 이 말은 ‘나는 잃지 않으려고 잃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의 잃어버림은 예수를 얻기 위한 최고의 빅딜이었습니다. 세속적 관점에서 바울이 버린 것은 위대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찰나를 버리고 영원을 얻었고, 필연적 사망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썩어질 면류관을 버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가면서
그리스도 안은 성도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그리스도 안은 세속을 떠나 머물러야한 거룩한 소망의 거주지입니다. 예수만이 참 소망의 주소지입니다. 바울은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을 잃고서라도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소망했습니다. 갈망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날 때 일어납니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육체의 것을 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생명과 영원한 것을 갈망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세례 받음으로 다시 보게 되었고, 그 후로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바울은 그 후로 물러나지 않았고,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다시 갖고 싶어 하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또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무엇을 잃었습니까? 아무 것도 잃기 싫어하면서 그리스도를 얻기 원한다면 자가당착(自家撞着)일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갈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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