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예배 역사에서 배우다 /주종훈 / 세움북스
예배 역사에서 배우다
주종훈 / 세움북스
헤겔(Hegel)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역사 변증법을 통해 역사의 발전을 개진하려 헤겔은 발전 속에 끊임없는 반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역사가 정. 반. 합을 통해 발전하는 것 같지만 결국 다시 정. 반. 합의 순환 속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후대의 일부 철학자들이 헤겔의 역사철학을 불교의 윤회론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박진영 아메리칸 대학 철학교수는 불교신문에 '헤겔의 <종교철학강의>와 불고'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일직선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의해 역사가 창조되고 타락과 구속이라는 걸출한 신학적 주제를 안고 역사를 점진적으로 발전하다 결국 종말에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것을 점진적 계시발전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울도 고전13장에서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리라'고 예언합니다. 또한 어거스틴의 경우는 천국은 하나님에 대한 앎의 점진적 기쁨의 시공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니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앎 역사 무한히 알아감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발전론을 개진하지만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스도 철학의 역사를 보더라도, 근대현대의 철학자들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그리스도 철학자들의 깊이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즉 퇴보는 해도 발전은 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어떤가요? 사도들보다 현대 신학자들이 깊이가 있는가? 아닙니다. 평신도였던 터툴리안보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성육신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더 후대인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이러한 신학에서 조차 역사는 발전이 아닌 퇴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이 발전이고 무엇이 퇴보인가를 논쟁하면 끝없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반 상식선에서 이야기하자면 역사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은 극히 미미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또한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근원과 경과, 그리고 현재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뿌리'라는 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아메리칸 흑인들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영화입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흑인들의 범죄율이 높은 이유가 그들의 환경 탓도 있지만, 그들의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지내왔는가를 알 때,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게 됩니다. 뿌리 찾기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 교과서'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유신이 지난 후 우리나라는 출판사의 개성에 맞는 역사책을 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다시 예전의 국가가 만들어준 역사책으로 공부하도록 만들 계획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찬성하며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위한 길일까요?
조종훈의 <예배 역사에서 배우다>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먼저는 지금의 예배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알 수 있었고, 바른 예배가 무엇인지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배워 바르지 못한 부분은 고치고, 바른 부분을 계승해야 합니다. 저자의 말을 직접 인용해 봅니다.
"이러한 예배 갱신을 위해서는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예배의 의미와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변화하는 시대에 적합하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문화를 민감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47쪽)
예배 역사를 배우는 것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과 일반이며, 지금 우리의 예배가 바른 것인지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역사로부터, 역사를 배워합니다. 저자는 지금 한국교회가 행하는 삼중 구조의 예배는 전통 개혁주의가 아닌 '18세기와 19세기 북미의 대각성 운동에서 비롯된 것'(37쪽)이라고 주의를 줍니다. 초대교회는 (1)음악, (2)말씀, (3)반응의 삼중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말씀, 기도, 세례, 성찬이라는 사중 구조를 대부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예배 구조와 얼마나 다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배의 역사에 무지했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90년대, 미국을 자기 집 드나들듯 드나들었습니다. '예배갱신'을 위해 미국에서 유행하는 구도자 예배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빌하이벨스의 윌로우크릭과 새들백 교회를 탐방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사실은 한국교회 목사들이 탐방했던 윌로우크릭의 구도자 예배는 예배가 아닌 전도 잔치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것이 선진국 예배 형태라 여기고 한국에 돌아와 접목시켰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고민 없이 가져온 카피목회는 교회를 병들게 하고 예배의 진정성을 사멸시킵니다.
2세기 예배 형태를 보면 말씀과 성찬이 중심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성찬은 현재의 정형화되고 간소화된 성찬이 아니었습니다.
"성찬은 성도들이 각자 준비한 빵과 포도주를 사제에게 전달하는 봉헌과 그것들을 하나님을 향해 내어드리고 감사하는 사제의 축사, 그리고 축사한 빵과 포도주를 집사들의 봉사로 다시 받아서 먹고 마시는 나눔의 방식을 모두 포함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음식들을 사제에게 맡기면 사제는 그것들을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필요한 이들에게 직접 찾아 나누어주는 일을 했습니다."(69쪽)
성찬은 교회 안의 예배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잇대어 있으며, 예배가 곧 삶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드림과 실천이 아닐까요?
4세기 예배 형태에서 또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경 읽기'입니다. 현재는 성경이 개인적이며 사소한 일상의 범주로 침전되었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성경 읽기는 함께 읽기였습니다. 교회 역사상 4세기는 신학의 정립이라는 중요한 신학 논쟁의 시기이기도하지만 고고학적으로 교회건물의 등장이라는 또 다른 이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동안 개인 가정에서 드려졌던 성찬 중심의 예배가 공공장소에서 드려지는 회중 중심과 성찬이 아닌 성경 읽기 중심으로 확대되었습니다.(88쪽)
예배는 형이상학적인 독립체가 아닙니다. 당시의 상황과 환경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초대 교회는 …….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통합시'켰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고, 새로운 시작과 함께 주어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 기독교 예배의 구체적인 의식을 통해서 과거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공동체가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성찬을 나누는 방식으로 기억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가능해진 새로운 생명과 곧 다시 오셔서 통치하시며 삶을 다스릴 것을 찬양, 기도, 말씀, 성찬의 방식으로 구체화 시켜 기대하고 구체적으로 미리 맛보기도 했습니다."(119쪽)
저자는 초대교회의 예배 형태와 현대의 예배들을 비교하면서 예배의 구성 요소가 가지는 의미를 밝히고 좀 더 바른 예배가 무엇인가를 다각 면에서 알려줍니다. 예배 관련 질문에 답하는 편지 형태로 모두 22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간과하고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있는 예배에 대해 알려 줍니다. 예배에 목숨걸어야하고, 예배에 성공하라하는 현대 목사들의 우격다짐식의 강요가 아닌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진솔한 예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읽어야할 책이라고 감히 말해 봅니다. 특별히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은 진지하게 이 책을 읽기를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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