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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은혜의 순간 / 튤리안 차비진 / 터치북스

샤마임 201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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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가 답이다

서평 은혜의 순간

튤리안 차비진 / 터치북스




은혜의 순간

저자
튤리안 차비진 지음
출판사
터치북스 | 2014-03-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Jesus All》의 저자, 튤리안 차비진의 최신간! 은혜는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며칠 째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이 중첩되면서 몸도 마음도 힘들어 한다. 두통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통증이 어디서 느끼는가도 모른다. <통증학>을 저술한 영국의 저명한 통증학 의사인 Patrick D. Wall 자신도 통증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한다. 이까짓 통증하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의학이라니. 다행히 아침이 되자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경험상 두통은 스트레스가 과중되거나 한계에 부닥쳐 힘들어 할 때 일어났다. 일의 압박과 성취에 대한 욕구가 과도하게 일어나 몸을 혹사 시킬 때면 두통이 급습했다. 아픔이 나쁘지만은 않다. 계기판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이유를 찾고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 두통은 나에게 쉬어야 한다고 일러 준다.

 

죄는 영혼의 두통이다. 의도하지 않는 부도덕과 나태함은 죄가 가져다준 일상적인 현상이다. 신자의 삶에 만연한 죄의 징후들은 끔찍한 타락의 결과들이다. 죄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사도바울은 율법에서 온다고 말한다. 태초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죄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과도한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했던 첫 사람은 율법의 종이 되었고, 왜곡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결국 속박된 노예로 전락했다. 그 후, 그들은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속박과 압박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하였고,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살았으나 죽은 존재가 되었다. 영혼의 두통은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모든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존재한다. 죄의 원인은 율법이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계명이며, 의지이다. 그럼에도 율법은 말씀대로 살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고자질쟁이다.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으면 두통이 끊임없이 재발되듯 율법이 사라지지 않으면 죄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요, 죄인임을 일깨우는 것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죄를 저지르게 한다. 참담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 무엇이 인류를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은혜가 답니다. 우리에겐 은혜가 필요하고 일방적인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튤리안 차비진 목사의 <은혜의 순간>은 지치고 상한 심령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일방적인 은혜를 선포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모두 10장으로 나누어 왜 은혜가 필요한지, 은혜가 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만이 전부임을 일깨워 준다. 구원에 이르는 데 우리가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가 율법에 의해 녹초가 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모든 것을 이루었’(278)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나의 힘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거룩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 결혼하기 전까지 만이다. 결혼한 후 나는 의인이 아니라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아내와 사사로운 의결충돌을 겪었고 서로를 헐뜯고 비방했다. 거룩한 형제라는 호칭은 오판이었다. 누군가 나를 건드리지 않을 때만 적용되는 일시적인 가면이었다.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인내하지 못했으며, 진지하게 상대를 배려하지도 못했다. 내 스스로 나의 실체를 보고 기겁했고, 목회자의 소명을 포기하고 싶었다. 아내와 심하게 다툰 어느 날, 비가 어둠을 뚫고 하염없이 내렸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음을 결심했다. 산 속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아직 비가 그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주님의 음성 같은 깨달음이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그래서 죽었다. 내가 죄인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일어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저자는 율법과 은혜를 장발장 이야기를 빗대어 이렇게 풀어낸다.

 

율법은 장 발장의 정체를 폭로하고 은혜는 그의 혐의를 벗긴다. 율법은 분석하지만 은혜는 석방한다. 율법은 기소하지만 은혜는 방면한다. 율법은 최고를 심판하지만 은혜는 최악을 구원한다. 율법은 저주한다!’라고 말하지만, 은혜는 축복한다!’라고 말한다. 율법은 하인이라고 부르지만 은혜는 아들이라고 부른다. 율법은 유죄 판결을 내리지만 은혜는 용서한다. 율법은 사람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지만 그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은혜뿐이다. 장 발장에게 일어난 일은 정확히 이런 일이었다.”(127)

 

장 발장은 정확히 나다. 율법은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나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고, 그렇게 하여 더욱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간다. 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죄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된다.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는 보수적 성향의 미국 시트콤 <비버에게 맡겨라>가 방영된 이후 1960년대에 미국은 자유연애 운동이 일어났고, 건전함과 근검절약으로 정평이 난 유타 주는 포르노 소비와 우울증 치료제가 전국 선두 자리를 달리고 있다(107)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율법은 죄악을 드러내지만 제거하지 못하며, 오히려 죄를 부추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복음은 우리가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18)을 믿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분을 바꾸는 것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제약 없이 전폭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칼뱅주의는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가 자발적인 선행을 낳는다.’(157) 율법이 아니다. 삭개오에게 필요한 것 넌 죄인이야라는 비판이 아니었다. 비판은 사람을 변화 시키지 못한다. 오직 은혜만이 변화 시킨다. 삭개오는 파격적인 주님의 은혜를 입고 변화 되었다. 나도 오직 은혜만으로 변화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죄악에 눈물을 흘리신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니, 이것은 친히 죄인과 친구가 되시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복수와 억압과 슬픔의 사슬을 깨뜨리는 유일한 길은 공로주의의 사다리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임을 그분은 아신다.”(159)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더 이상 율법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혼의 두통이 사라진 것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노예가 아닌 아들로, 속박이 아닌 자유로, 의무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예수 안에서 베풀어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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