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어떻게 준비해야할까?
설교는 어떻게 준비해야할까?
오늘은 누가복음 주석 18:1-8을 다루었습니다. 익숙한 본문이고 보통 '강청하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많이 설교합니다. 충신교회 목사였던 박종순 목사의 설교는 이렇습니다.
먼저 두 가지 주제로 간략하게 시작합니다.
[ 첫째는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희망을 품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아래는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가지고 단어와 구절을 풀어 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100번 기도하면 천 가지 만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한번 기도안하면 천 가지 만 가지 나쁜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충신교회는 두 가지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운동이고 하나는 전도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그 어느 운동에 비길 수가 없는 운동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본문의 과부처럼 밤낮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낙심을 물리칩시다. 낙심 말고 기도합니다!]
결론은 버킹검이죠. 열심히 기도하자. 입니다. 평범한 설교지만 왠지 심령을 후벼 파는 힘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설교도 여기서 빗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상당히 어려운 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과부의 기와 성도의 기도를 일치 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물론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을 '하물며'라는 축을 통해 치환시킴으로 사랑의 풍성한 하나님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런 면에서 과부의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느 부분 일치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과연 맞는가는 난해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주기도문과 이 본문이 같은 맥락을 갖는가 입니다. 과부의 기도는 원수에 대한 원한입니다. 즉 법적인 대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의'를 위한 기도합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과 '낙심'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모든 일에 계속하여 기도하라는 의미로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적 약자의 문제로 들어가면 정치가 개입하게 됩니다.
앞부분 그러니까 17장은 열 명의 나병환자의 치유와 종말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이 끝나는 18:9부터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비교 되면서 자신을 낮추는 것에 대한 강조를 이어갑니다. 악한 세리의 기도는 응답되지만, 착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절당합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 부분은 상당한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세리는 한국 상황으로 가져오면 친일파거든요. 그들에게 정의는 상실되고 없습니다. 그런데 정의가 없는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다니요. 그렇다고 세리가 회개하고 세리직을 그만 두었거나 착한 세리가 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대로 쭈욱~~~ 세리로 살아갈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니 그의 기도 응답은 청중들에게 경악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단락을 하나의 주제로 끌고 간다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일관성은 있어야 합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은 향상성과 통일성을 갖고 있거든요. 두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로 끌고 가면 오직 한가지로 좁혀집니다. 그것은 '간청'입니다. 도와 달라는 기도입니다. 세리는 과부처럼 약자가 됩니다. 바리새인은 감사하지 간청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그는 하나님 앞에 의인입니다. 피츠마이어는 여기서 중요한 언급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감사 기도를 통해 그는 분명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지만 언급된 이유들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피츠마이어 <앵커바이블, 누가복음2>)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소위 주석으로 불리는 책들은 문단, 구절, 단어는 풀어내지만, 전후 문맥을 고려하거나 통전적 관전으로 단락들을 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의 관점이란 '통'으로 본다면 눅18:1-8까지의 본문은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정의의 문제이고, 하나님 나라의 공의의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고민 없는 성경 해석은 그릇된 해석을 하게 되고, 그릇된 해석은 그릇된 설교로 이어집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의도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반하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즉 눅 18:1-8절을 '기도'만으로 설교를 한다면 완전히 잘못된 설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원수를 갚는 하나님으로 풀어 나가야 더 정확하게 본문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종말론적 의미, 희년의 의미 등으로 끌고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정경학적 해석으로 본다면 완성된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죠. 즉 불의한 재판관, 약자인 과부, 원한, 원수 등을 주목한다면 곧바로 해결됩니다. 근거 없는 왜곡된 해석에서 함몰되어 성경의 원뜻에 반하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복음을 설교하기 전 누가신학을 읽으면 이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수백페이지도 아니고 5장 정도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읽지 않고 곧바로 예전부터 들어오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 주해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카프카의 언급한 것처럼 어찌 성경이 바른 '도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도끼가 자신을 죽여야 하는데, 교인들을 죽이고 엉뚱한 사람을 죽이니 말입니다. 설교자라면 기본적으로 이렇게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개요나 총론을 읽으십시오. 누가복음을 설교하려면 누가신학에 대해, 누가복음 신학을 먼저 읽고 누가의 관점과 의도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누가신학 관련 서적은 많습니다. 최근에 부흥과개혁사에서 나온 대럴 L. 벅의 <누가신학>이 있습니다. 화이트의 <누가신학연구>도 있습니다. 김경진의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누가신학은 하워드 마샬을 뺄 수 없습니다. 그의 책 <누가행전> 도 참고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주해해야합니다. 강해가 아닌 주해입니다.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피고, 원서와 번역서를 참고해 자신만의 번역?을 해야 합니다. 전체적 맥락을 잡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몇 가지의 주석을 비교하여 강해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위한 강해가 아니라 본문을 강해야 합니다.
네 번째 단계가 설교 준비 단계입니다. 본문에서 끌어낸 주해와 강해를 통해 설교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설교자는 설교 이전에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하고, 깊이 묵상하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설교 본문을 적어도 20-30번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위의 단계를 대부분 거칩니다. 습관적으로 성경을 주해하거든요. 때론 묵상글로 남기기도 합니다. 목사는 적어도 하루에 2시간 정도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쉬운 게 아니지만.
너무 쉽게 설교용 주석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용 주석을 굳이 언급하라면 찰스 스윈돌 주석 시리즈, 유동근 주석, 메튜헨리 주석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 책들은 즉석에서 베낄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어떤 분들은 설교집을 열심히 읽고 그대로 옮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것으로 소화도 하지 않는 상태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설사 하는 것 아닙니까?
개인적으로 <매일성경>이나 <생명의 삶>을 따라 꾸준히 묵상하고 연구하는 게 제일 편한 것 같습니다. 저는 한 권씩 연구합니다. 마태복음을 하면 마태복음에 관련된 주석과 연구서등을 구입해 읽습니다. 주석과 연구서를 합하면 대략 10권에서 20권 정도 됩니다. 이렇게 두 달 정도 파고 들어가는 것이죠. 이렇게 꾸준히 묵상하고 연구하다보면 성경이 말하는 원뜻에 좀더 가까이 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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