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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레스 웃사, 삼하 6:1-11

샤마임 2011.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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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스 웃사

삼하 6:1-11

  

서론

 

시대를 정의하는 용어들은 많습니다. 저는 이 시대를 일컬어 자판기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파기가 가장 활성화된 나라는 일본입니다. 일본에는 자판기가 얼마나 많은지 없는 거 빼고 다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자파기가 많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체험한 자판기만 해도 수백 가지는 족히 넘는 것 같습니다. 커피자판기가 제일 많습니다. 커피 자판기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요즘은 기본적으로 냉커피가 되는 자판기가 많이 나옵니다. 작년 유행한 원두커피 자판기도 있습니다. 돈을 넣고 누르면 뽑은 커피가 즉석해서 갈리고, 원두에서 방금 내린 커피가 추출되어 나옵니다. 계란 후라이 자판기도 있습니다. 책 자판기도 있고요. 담배, 화장지, 과자, 등등 없는 거 빼고 다 있습니다.


자판기의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편리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수입도 짭짤합니다. 작년인가요. 어떤 TV프로에 보니 아줌마가 자판기를 30대 정도 가지고 있는데 한 달 순수익만 해도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자판기가 다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판기는 전기세도 못 건지는 자판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목이 좋은 곳에 설치된 자판기는 장사가 아주 잘 됩니다. 자판기의 특징은 사람의 욕구를 잘 파악하여 원하는 것을 주기 때문에 매우 유용합니다. 자판기는 철저하게 인간의 욕구를 반영합니다. 원하는 물건을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면 그에 상응하는 상품을 얻을 수 있습니다.예상이 가능하고 조작이 가능하며, 약간의 대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기능을 가진 물건입니다.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 도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편하기 때문에, 빠르기 때문에 상품의 질도 보증하기 때문에 자판기는 이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명의 이기입니다. 우린 사실 이러한 자판기적 생활과 사고에 물들어져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즉흥적이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받아낼 수 있는 무언의 사고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판기적 사고의 형태는 우리의 신앙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적당한 상품을 얻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면 당연하게 하나님은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약간의 수고, 약간의 헌신, 약간의 봉사, 약간의 헌금, 일정한 양의 예배참석과 경건의 형태 등을 지불하고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달라고 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자판기식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본문으로....

본문은 다윗이 70년 전 블레셋과의 아벡전투에서 잃어버린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가운데 일어나 사건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전리품으로 얻은 여호와의 법궤를 다곤 신전에 둡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다곤 신전에 가보니 다곤 신상이 부러져 법궤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후로 법궤를 옮기는 곳마다 재앙이 일어나 큰 곤욕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블레셋은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한 다음 새수레 실려 벧세메스로 돌려보냅니다. 벧세메스에 도착한 법궤를 벧세메스 주민들이 안을 들여다 보다 칠십 명(오만)이 죽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삼상 6:20)

 

그들이 발견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직 온 천지 만물을 통치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운행하시는 주재시오, 왕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법궤를 함부로 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가나안 정복 후 실로에 법궤가 모셔진 뒤 법궤를 거의 잊어 버렸습니다. 약 400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가 전면으로 등장합니다. 비록 사사들이 활동하며 실로의 성막에 있기는 했지만 법궤는 잊혀진 존재나 마찬 가지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은혜와 긍휼의 상징입니다. 오직 법궤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법궤는 결국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보내져 7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 동안 사울이 왕이 되었다 죽고, 다윗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안정시키고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라가 안정을 찾자 다윗은 잃어버린 법궤를 생각하며 찾기 시작합니다. 법궤를 찾으려 갈망했던 다윗의 심정은 시편132편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2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6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6:1을 보면 다윗은 법궤를 모셔오기 위하여 삼만의 군사를 동원합니다. 지금도 많은 숫자인데 당시의 삼만은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잣나무로 만든 여러 악기가 동원됩니다. 법궤를 가져오려는 다윗의 열정을 보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소외된 것을 보고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시작합니다.

3절 아비나답의 아들 ‘벤’은 후손이란 뜻으로 그들은 손자일 것입니다. 아효와 웃사가 새수레에 법궤를 싣고 몰로 나옵니다.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가 갑자기 뛰기 시작합니다. 수레 뒤에서 따라오던 웃사가 법궤를 붙잡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웃사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립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자 그렇게 흥겹고 떠들썩하던 그 곳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 얻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웃사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9절에서 다윗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하며 법궤 이동을 중지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우린 이 본문을 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왜 그랬나’ 궁금하기도 하고, ‘너무 했다’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웃사의 수고를 보십시오. 3대째 법궤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70년 동안 주님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결국 죽음이란 말인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하나님을 섬겼는데 축복을 배로 받아도 시원치 않을 사람이 죽음이라뇨 이게 말이나 됩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우하신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고 믿을 이유는 없어지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신 적 없습니까?

 

본문으로 다시 들어가 봅니다.

 

첫 번째 잘못은 법궤를 잘 못 옮겼다.

첫 번째 문제는 방법상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옮길 때는 반드시 레위인 중에서도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분명히 명시했습니다. ‘삼하’에는 나오지 않지만 역대상 15:13에는 다윗이 진노하신 이유를 규례대로 즉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대로 옮기지 않았다고 분명히 언급합니다. 민수기 4장에 고핫자손들의 임무가 나옵니다. 민 4:15에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정말 몰랐을까요? 다윗이 정말 몰았을까요? 아효와 웃사가 정말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6:2을 보십시오. 다윗은 분명히 법궤를 메어오려고 했습니다. 아호와 웃사 역시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법궤는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효와 웃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막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법궤 이동에는 누구나 다 아는 거대한 음모와 계락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법궤가 처음으로 수레에 실려진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다시 벧세메스로 돌려보낼 때입니다. 이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니고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법궤를 다룰 줄 아는 지식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았고 허용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허용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동일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효와 웃사가 이것을 자신들에게 적용시켰을 때 문제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범죄 할 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벌하지 않으시고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보고 ‘나도 그렇게 하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하며 죄를 범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분명 초등학생의 시험과 박사과정의 시험은 완전히 다릅니다. 아효와 웃사는 이것을 착각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아효와 웃사도 분명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고핫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식적으로 법궤를 옮기게 된다면 그들은 법궤를 고핫자손들에게 내어 주어야 하고, 자신들은 이 영광스러운 잔치에서 소외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수레였습니다. 수레에 법궤를 실어 나르는 것은 이미 블레셋이 옮길 때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때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은 그들의 비상한 머리를 돌려서, 그것을 법궤를 옮기는데 이용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전통입니다. 그리고 한 번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흉내 내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밀어붙이기 시작합니다. 분명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되도 그것이 맞다고 우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멋지고 화려하고 웅장한 수레였습니다. 또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3대째 법궤를 관리한 명문가문입니까? 아무리 다윗이 왕이라도 그들이 가지는 전통과 권위 앞에서는 아무런 댓구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법궤는 고핫 자손들의 어깨가 아니라 인간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새수레’에 실려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아효와 웃사는 하나님의 허용하심과 계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도 그들의 권위와 전통과 충성스러운 헌신 앞에서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한 두 사람의 작당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한 데 엮어진 거대한 음모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새수레’라는 헌신과 전통 속에 교묘하게 감추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며, 웃사가 흔들거리는 법궤를 ‘붙잡았다’고 말하는데 이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아하쯔’로 자신의 소유를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즉 웃사는 법궤를 마치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웃사가 법궤를 붙잡은 이유는 만약에 법궤를 잃어버리면 지금까지 사진이 수고와 노력이 허사가 될뿐더러,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웃사의 그런 오만과 거만함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쭈물딱 거린 것입니다. 그 옛날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부적처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간 것처럼 웃사와 아효 역시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의 명예와 기득권을 위해 헌신과 전통이라는 새수레에 숨겨 법궤를 이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맘대로 조작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웃사를 치셨습니다. ‘베레스’는 대항하다, 싸우다, 치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웃사’의 뜻은 힘, 권력,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힘과 권력, 욕망을 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조작되거나,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며, 오직 하나뿐인 예배할 분이십니다.

삼상 2:27-36에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께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는 본문을 접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웃사의 사건 이후 법궤를 가져간 곳은 오벧에돔의 집으로,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입니다. 불과 석달 동안 법궤를 모셨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주실까요? 베레스 웃사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간다면 너무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안아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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