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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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수요일 설교한 '베레스 웃사'는 원래 제목을 '위험한 하나님'으로 설정했다.
설교/ 베레스 웃사, 삼하 6:1-11
그러나 본문을 좀더 세밀하게 탐독해 가면서 위험한 하나님도 좋지만 원래 의미인 베레스 웃사로 결정했다. 책을 쓰거나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제목는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설교는 제목보다는 내용이 더 중시 되기 때문에 굳이 그런 파격적인 제목을 붙일 이유는 없어 보였다. 흐르는 주제는 위험한 하나님이시지만, 강조하고자하는 부분은 설교를 듣는 바로 '나'이기 때문에 웃사인 '나'를 '베레스'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베레스 웃사를 준비해나간 과정을 보면 나의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실감한다. 처음 잡은 본문은 새벽기도회 때 진행하는 베드로전서나 창세기를 강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연하게 이재철 목사님의 '인간의 일생'을 접하면서 본문을 수정했다. 전에부터 읽어온 유진피터슨 목사님의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란 다윗의 일대기를 다룬 글이 매치되면서 본문을 삼하 6장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보니 근래에 들어와 주일낮 설교가 아닌 수요일 주일저녁 설교들이 계속해서 사무엘서를 강해하게 되었다. 이것도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본문을 정하고 본문을 주해했다. 사무엘서의 전체주제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것이다.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가 하나님의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은 '법궤'를 통해 나타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상징적 존재가 바로 법궤인 것이다. 아벡전투에서 빼앗은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전에 전리품으로 둔다. 하나님은 다른 신의 전리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다곤신상이 법궤에 절하는 것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신다. 또한 법궤를 자신들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은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웃사를 치심으로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신다. 여호와(법궤)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베레스웃사 사건의 숨겨진 배후들을 추적하면서 전통과 권위 속에 숨겨진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읽어 내기시작했다. 70년에 가까운 법궤를 지키는 사람으로서의 전통과 권위를 가진 아비나답의 가족, 그러나 그들은 진심으로 법궤를 지킨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법궤를 이용한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상상해 보면, 웃사의 가족은 법궤이동 전에도 법궤를 지키는 가문으로서의 으시대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웃사 가족의 헌신과 전통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은 보신다.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모든 것들 '베레스'하신다.
서론을 설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문과 적합한 서론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설교를 준비할 때 서론 없이 바로 설교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어달 전에 메모해 두었던 자판기와 하나님이란 글이 생각이 났다.
[Idea Memo] - 자판기와 하나님
자판기는 인간의 힘으로 조정하고 일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즉 공식이 가능한 기기인다. 25+25=50 이 된다. 두 함수를 적절히 이용하면 원하는 답을 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70을 얻고 싶으면 한쪽에 20을 추가하면 70의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그럴까? 하나님도 적당하게 조작하고 조정할 수 있을가? 자판기에 500원을 넣고 커피를 뽑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값싼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자판기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무당들이 푸닥거리를 몇번 한 다음 귀신들을 달래고 제물을 바쳐 원하는(그것이 어떤 것이든) 것을 얻어내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이다.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당한 헌신과 헌금을 내어놓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고했던 책은 월터 부르지만의 '구약개론'과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책이다. 숨겨진 하나님, 정의할 수 없는 하나님을 연구한 책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을 분명하게 아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다.
설교/ 베레스 웃사, 삼하 6:1-11
그러나 본문을 좀더 세밀하게 탐독해 가면서 위험한 하나님도 좋지만 원래 의미인 베레스 웃사로 결정했다. 책을 쓰거나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제목는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설교는 제목보다는 내용이 더 중시 되기 때문에 굳이 그런 파격적인 제목을 붙일 이유는 없어 보였다. 흐르는 주제는 위험한 하나님이시지만, 강조하고자하는 부분은 설교를 듣는 바로 '나'이기 때문에 웃사인 '나'를 '베레스'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베레스 웃사를 준비해나간 과정을 보면 나의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실감한다. 처음 잡은 본문은 새벽기도회 때 진행하는 베드로전서나 창세기를 강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우연하게 이재철 목사님의 '인간의 일생'을 접하면서 본문을 수정했다. 전에부터 읽어온 유진피터슨 목사님의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란 다윗의 일대기를 다룬 글이 매치되면서 본문을 삼하 6장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보니 근래에 들어와 주일낮 설교가 아닌 수요일 주일저녁 설교들이 계속해서 사무엘서를 강해하게 되었다. 이것도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본문을 정하고 본문을 주해했다. 사무엘서의 전체주제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것이다.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가 하나님의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은 '법궤'를 통해 나타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상징적 존재가 바로 법궤인 것이다. 아벡전투에서 빼앗은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전에 전리품으로 둔다. 하나님은 다른 신의 전리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다곤신상이 법궤에 절하는 것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신다. 또한 법궤를 자신들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은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웃사를 치심으로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신다. 여호와(법궤)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베레스웃사 사건의 숨겨진 배후들을 추적하면서 전통과 권위 속에 숨겨진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읽어 내기시작했다. 70년에 가까운 법궤를 지키는 사람으로서의 전통과 권위를 가진 아비나답의 가족, 그러나 그들은 진심으로 법궤를 지킨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법궤를 이용한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상상해 보면, 웃사의 가족은 법궤이동 전에도 법궤를 지키는 가문으로서의 으시대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웃사 가족의 헌신과 전통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은 보신다.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모든 것들 '베레스'하신다.
서론을 설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문과 적합한 서론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설교를 준비할 때 서론 없이 바로 설교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어달 전에 메모해 두었던 자판기와 하나님이란 글이 생각이 났다.
[Idea Memo] - 자판기와 하나님
자판기는 인간의 힘으로 조정하고 일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즉 공식이 가능한 기기인다. 25+25=50 이 된다. 두 함수를 적절히 이용하면 원하는 답을 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70을 얻고 싶으면 한쪽에 20을 추가하면 70의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그럴까? 하나님도 적당하게 조작하고 조정할 수 있을가? 자판기에 500원을 넣고 커피를 뽑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값싼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자판기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무당들이 푸닥거리를 몇번 한 다음 귀신들을 달래고 제물을 바쳐 원하는(그것이 어떤 것이든) 것을 얻어내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이다.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당한 헌신과 헌금을 내어놓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고했던 책은 월터 부르지만의 '구약개론'과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책이다. 숨겨진 하나님, 정의할 수 없는 하나님을 연구한 책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을 분명하게 아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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