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축복을 취하라
하나님의 축복을 취하라
-정현욱목사
신평로교회 주일낮설교, 20100711
신평로-주일낮-20100711 요단강을건넌사람들.hwp
어릴 적 소풍가는 전날 밤은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쳐가며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새하얗게 보냈습니다.
소풍가라고 사준 왕자표 깜장 고무신,을 토방 밑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요쿠르트 하나 사먹으라고 준 단돈 100원도 호주머니에 넣고, 일년에 한 두 번을까 말까하는 쌀밥에 계란 후라이가 얹어진 노란색 알미늄 벤또...
그리고 잠들기 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저에게 왜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당신은 밤을 왜 이렇게 길게 만들었습니까? 오늘만은 밤이 없이 곧바로 아침이 오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학교가기 싫어서 아침마다 엄마가 다섯 번은 깨우러 와야 겨우 일어나는 아침도 그날만은 제가 엄마를 깨우러 갔습니다. “엄마! 엄마는 왜 이렇게 잠을 많이자.. 오늘 보니 엄마 잠꾸러기네” 하면 엄마 한테 잔소리하다 “야 이 자슥아 오늘처럼만 살아라 그러면 엄마가 원도 없겠다”라는 말을 듣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소풍날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던 전날밤이 그랬습니다. 그날은 특별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40년이라는 기나긴 사막 광야의 삶을 정리하고 드뎌 400년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기적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고,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일이 오늘 여기서 일어나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꿈이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며 살아가려는 자세는 천국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성도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비전가이어야 합니다. 내일을 기대하며 밤잠을 설쳐가며 찬란한 아침의 태양을 맞이해야 합니다. 근래에 들어와 적지 않은 교회들이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시도도 하지 않고 아예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한 지적들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어쩌면 별 성과도 없어 보이는 여름행사에 수백에서 수천만원씩 쏟아 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효율을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비록 사실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미래요, 한국교회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우리 교회가 또는 한국 교회가 중대한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장악한 것처럼, 우리도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건너가 하나님의 축복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축복을 취할 마지막 장애물이며, 문이기도 한 요단강에 서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축복의 땅을 향해 나아갑시다. 용감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그 땅으로 들어가 주님께서 허락하신 축복들을 취합시다. 저는 주님의 축복을 취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 세가지의 방법들을 고찰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 번째 원리는 언약궤를 따라가는 것이다.
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하나님께서 첫 번째 주신 명령은 언약궤를 따르라는 것이다. 주님은 언약궤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4절에서 ...
언약궤를 가까이 하면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언약궤를 무리에서 떨어져 앞서 가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언약궤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
두 구절 속에서 우리는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가 가지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의 하나님, 다른 하나는 온 땅의 주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바꾸면 ‘온 땅의 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얼마나 행복하고 설레는지 모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라는 말은 소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우리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법상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말하면 맞지만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수아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감히 온 천지의 주재이신 그분을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는 표현은 우리를 더욱 설레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온 땅의 주’님이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땅입니다. 온 땅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평도 주님의 땅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땅을 만드셨고 건설하셨습니다. 땅의 주인이 우리에게 땅을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흥분되고 행복한 사실입니까? 우리가 아멘으로 응답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오늘 그 주님이 앞서 가십니다.
포도원을 맡기고 떠났던 주인이 다시 찾아야 그 땅을 되찾아 우리에게 주려하십니다.
언약궤가 어떤 것입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언약궤는 광야 가운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하기로 서약한 결혼증명서와 같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남편이며, 우리의 주인되신 그 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늘 앞서 가고 계십니다.
우리의 일은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앞서가면 안됩니다.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가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앞서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셔서 적을 무찌르며,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 제자들의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출] 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출] 23: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출] 23:27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
[출] 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신] 1: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신]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신] 1: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신] 1: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다른 방법을 찾지 마십시오. 앞서가시는 언약궤를 따라가야 합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의 길이요 답입니다.
2. 성결하라
두 번째 명령은 성결하는 말씀입니다.
5절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경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우리는 본문 속에서 성결하라는 명령이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는 알기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성결하라는 말씀을 통해 세속적인 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헌신하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죽음을 상징하고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여호수아의 성결하라는 말씀은 세속적 모든 것을 죽이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뜻은 좀더 긍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결의 의미는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단절과 절제의 의미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직 주께만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결은 ‘오직 주께만’입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열정, 우리의 수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꿈과 비전을 ‘오직 주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를 따라오너라’를 말씀하실 때 그것이 ‘오직 나를 위하여 살아라’는 뜻인 것처럼, 성결은 오직 주께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 탐욕, 복수심, 시기심,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께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오로지 주님만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결이 가진 참된 의미입니다. 단순히 금식하고 절제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의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이 성결입니다. 신약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금식하고, 참고, 기다리는 것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치유하셨고, 회복시켰고, 일으키셨고, 그리고 모두를 살리셨습니다. 오로지 그 것만을 위해 주님은 전생애를 드린 것입니다.
성결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여호수아는 그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놀라운 이적으로 함께하신 하나님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함께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어떻게 역사하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밤을 지새우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정리하도록 말씀하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잡다한 생각과 의견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많은 시간 의논하고 회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온전히 주님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위해 부름 받았고 그것위해 살아야 합니다.
성결해야 하는 이유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준비할 때 단장하고, 조신하게 행동하듯 내일의 이적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에 큰 역사와 이적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 기대와 설레임으로 종종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합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마지막으로 여호수아는 9절 말씀을 통하여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요단강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합니다. 15절 상반부에 보면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쳤더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시기는 홍수가 나듯이 큰 물결이 세차게 일어나는 시기라는 뜻입니다. 몇 년 전에 이스라엘을 다녀오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가보니 요단강은 작은 또랑에 불과하더라. 그런 강은 어지근한 사람들은 누구나 건널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3천년 전의 요단강이 지금의 요단강처럼 작은 또랑에 불과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작은 또랑을 건넌다음 “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고 말했을까요? 3천년 전의 요단강이 지금의 요단강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의 요단강은 장엄했고, 성난파도가 넘실거리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을 건너라고 한 시기는 모맥 거두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는 팔레스틴 지역의 북에 있는 만년설이 있는 헐몬산의 눈들이 녹아 내리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겨울내 내렸던 눈이 모맥 거두는 5-6달에 녹아 내리면서 요단을 타고 내려오는 시기였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은 늘 이런식이었습니다. 그냥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고난을 주시고 어려움 속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몰아넣습니다. 그냥 조요히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시끄럽게하고, 야단벅석을 떨게 합니다. 그런다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에 순종만 해라, 네가 만약 네 말에 순종만하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수를 읽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다가, 하나님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식으로 일해야 합니까? 왜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까? 좀더 쉽고 좀더 간단하고, 좀더 편한 방법은 없단 말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편안. 꿈에도 소원은 안정... 내 목숨 다하여 안락.. 편함을 주소서...
김지찬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이스라엘의 인식의 변화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요단 강물을 이기고 승리하심으로, 사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땅의 주이시며, 가나안 땅은 여호와의 땅이며, 여호와께서 가나안 민족을 정녕 몰아내시기로 하셨다는 사실을 기념할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이나, 탁월한 지식이나, 창조적 능력이 아닙니다. 바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멘 제자들에게 요단강가에 들어서거든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발이 그 물 안으로 들어가면 강물의 끊어져 서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고 결정할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물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가나안의 족속들을 몰아 내실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10절 하반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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