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한 결혼(1) 아담과 하와의 결혼
성경에 나타한 결혼(1)
아담과 하와의 결혼
성경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든다. 보수적인 교단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고 목사로서 사역을 한다. 그러다보니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결혼관이 학습된 것 같다. 한 번도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생활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장로교단의 특징은 어떤 주제가 나오면 교리부터 들이댄다. 그 다음에 나오는 건 칼빈과 종교개혁자들, 그 다음은 교부들의 의견이다. 성경까지 가는 건 아주 드물다. 성경부터 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찾아야 하는데 순서가 바꿨다.
오늘 일본에서 온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누다 문득 성경에서 결혼은 무엇이라 하는가 궁금해 졌다. ㄱ선교사님은 나이가 오십이 넘어 일본 선교사로 넘어가 일본 현지인과 결혼한 분이다. 오십이 넘어 결혼한 것도 화제고 일본인 현지인과 결혼한 것도 특이하다. 자매의 가족들은 전통 일본인들로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교회에 가본적도 없고 본적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 가정에서 한국인 목사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닌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결혼
결혼하면 최초의 결혼인 아담과 하와를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몇 가지 정황만을 살펴 보자.
먼저 부모가 없다.
당연한 것이지만 결혼이 독립적 존재가 된다는 의미에서 부모가 없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다. 처음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부모가 된다. 이후로 나오는 닮음은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주된 이야기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아담은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존재다.
둘째 아내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온다.
성경은 하와를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다고 기술한다.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이 설화 같은 이야기는 수많은 해석과 상상력을 요구 했다. 전통 기독교 해석자들은 발로 만들면 억압과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고, 머리로 만들면 교만해지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중간인 가슴에서 뼈를 빼어 내었고, 심장을 감싸는 역할로서의 갈빗대가 쓸모 있듯이 여자 또한 남자의 심장을 보호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만족하기는 많이 부족하다.
중요한 것 하나는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며, 둘은 하나였다는 점이다. 부부는 둘이 아닌 하나로서 독립적 존재이다. 바울은 이점을 들어 서로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한다. 고전11:9에서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임을 강조한다.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존재한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쉽지 않다. 오해하면 여자는 철저히 남자를 위해서만 존재해야하는 부속품처럼 보인다. 이 구절은 가부장적 문화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억압할 때 애용된다. 그러나 12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남자도 여자에게서 났으니 남자 또한 여자를 무시할 권이 없다고 선언한다. 궁극적으로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 선언한다.
부부는 돕는 관계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독처가 좋지 않았고 그(아담)를 ‘위하여’ 돕는 배필(도움이)을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창2:18)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고 왔다.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거행되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결혼을 통해 소명이 주어진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소명,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를 다스리라는 소명이다.(창1:28)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고 못 박는다. 일이 복이고, 복이 일이다.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생육과 번성은 짝을 이룸으로 비로소 완전해 진다. 소명은 결혼이란 신비를 통해 실현 된다. 결혼은 생물학적 결함을 훨씬 뛰어 넘는다. 강요나 억압으로서 화합될 수 없다. 다른 생각과 의견을 충분히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하고,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면 안 된다. 서로 사랑으로 소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돕는 배필을 다시 생각해보면, 남자의 일방적인 통보가 아닌 소통과 공유를 통한 인격적 화합이 있어야 한다. 돕는 배필은 사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아담의 인격과 성품과 신앙에도 관여한다. 참고 기다려주는 훈련을 하와를 통해 배우게 된다. 근래에 뇌과학 이론이나 심리학적 발견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는 다른 뇌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오해와 다툼의 소지가 농후하다. 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고, 용납하고 온유함으로 가르쳐야 한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물음은 진지하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기 2:24을 인용하신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라는 권위의 궁극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람의 필요나 원함에 따라 떨어질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소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함이 하나님의 원(原)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혼을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떨어뜨렸다. 신성한 사역이 우상숭배가 되는 경계선은 욕망이다. 결혼은 서로를 이용할 수 없다. 서로가 목적이며 여정이고 존재의미다.
부모를 떠나라.
부모는 의존의 대상이다. 어떤 학자는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인 독립까지 포함시킨다. 좋은 해석이다. 생존을 위해 부모는 불가피하다. 결혼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결혼 전까지 사람은 부모에게 의존한다. 생존을 위해서, 화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결혼은 의존적 관계에서 독립적 존재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협력관계로 성숙한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아내와의 관계로 나아간다. 부모와 의논하지 않고 아내와 의논하고, 부모의 명령을 받지 않고 아내와 공유한다.
정서적 측면에서도 아내는 부모를 대신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래 전 이야기하였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홀로 살 수 없다. 살면 안 된다. 함께 살아야 사랑하는 법도 배우고 진정한 자유와 헌신을 배운다. 결혼은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희망을 만드는 곳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보면 바울이 결혼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로 도약시킨 이유를 알 것 같다. 남편은 아내를 생명 다해 사랑해야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철저히 복종함으로 한 몸임을 증명한다. 결국 결혼은 ‘사랑’으로서만 가능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성경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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