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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9가지 열매 1) 사랑(ἀγάπη)

샤마임 202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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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9가지 열매로서의 사랑

갈라디아서에 소개되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첫번째 사랑에 대한 주해와 묵상입니다.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성령의 열매, 그 첫 번째 – 사랑(ἀγάπη)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사랑은 단순히 목록의 시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머지 모든 열매의 기초이며, 핵심이며, 동력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희락도, 화평도, 오래 참음도, 자비도, 충성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전체를 꿰뚫는 심장과도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열매는 외양만 있을 뿐, 생명력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두 가지 삶의 방향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열과 탐욕, 불화와 우상숭배로 흐르지만, 성령의 열매는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하나님 중심의 성품입니다. 그 시작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심’하거나 ‘실행’하는 수준의 사랑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초자연적 열매입니다. 사랑은 신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크고도 깊은 책임이자 선물이며, 성화의 열쇠입니다.

‘사랑’은 인간 삶에서 가장 오용되고 남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하고, 상처주며, 집착하고, 때로는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닙니다. 그것은 주는 사랑이며, 남김없는 사랑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베풀어진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바울이 강조한 ἀγάπη(아가페)의 사랑입니다.

ἀγάπη(아가페) – 하나님의 본질을 닮은 사랑

갈라디아서 5:22에서 바울이 사용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ἀγάπη입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매우 독특한 개념으로, 일반적인 우정(φιλία, 필리아)이나 연애적 사랑(ἔρως, 에로스), 혹은 가족 간의 사랑(στοργή, 스토르게)과는 명확히 구분됩니다. ἀγάπη는 자기를 비우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상대의 반응과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사랑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특히 신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재구성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핵심 용어로 자리잡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이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 사용된 '사랑'이 바로 ἀγάπη입니다. 이는 감정적 끌림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헌신과 자기 내어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반응이나 자격과 상관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처럼 ἀγάπη는 '주체적 사랑'이자 ‘은혜의 사랑’입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신약 이전의 헬라어 문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던 단어였습니다. 바울과 요한은 이 단어에 신학적 생명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속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랑은 이제 감정이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 자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5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곧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우리의 존재 안에 심겨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더불어 주목할 점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결론짓는 대목입니다. 왜 사랑이 제일일까요? 믿음과 소망은 이 땅의 시간 속에서 기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하늘에서도 계속될 유일한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8).

또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문장들은 단순한 시적 수사가 아니라, 성령께서 빚어내시는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성품의 모습입니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와 그대로 겹쳐집니다. 사랑은 열매의 첫째일 뿐 아니라, 나머지 여덟 가지 열매들을 가능케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좋습니다. 이제 세 번째 항목인 “성경 전체 속 사랑의 통일성” 부분을 약 1200자 분량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구약과 신약 전체 흐름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일관된 중심 주제로 드러나는지를 신학적 관점과 묵상적 언어로 함께 서술합니다.


성경 전체 속 사랑의 통일성 – 하나님의 이야기로서의 사랑

성경 66권은 다양한 저자와 시대를 거쳐 기록되었지만, 그 중심을 이루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경을 구성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꿰뚫는 신적 선율이며, 인류 구원의 거대한 서사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 전체를 흐르는 사랑의 구조를 통찰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랑의 단어는 히브리어 **חֶסֶד (헤세드)**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충실함(covenantal faithfulness)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배신하지 않으시며, 백성들이 불순종할지라도 그들을 끝까지 돌보시는 신실한 사랑을 헤세드라는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시편 136편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반복으로 하나님의 헤세드를 찬양합니다. 여기서 인자(仁慈)는 단지 자비로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또한 구약의 또 다른 중요한 단어는 אָהֵב (아하브), 곧 인간의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신명기 6:5에서 하나님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은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 전환점을 맞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언약적 사랑을 잇되,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실체화합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율법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은 율법과 예언서의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이며, 구약 전체가 바라보던 사랑의 실현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보다 심화하여 설명합니다. 로마서 13장에서 그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율법을 이루는 ‘본질’입니다. 즉 사랑은 율법의 종착점이며,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의 윤리적 본성입니다.

신약의 사랑은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 그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로 정의하는 이 말씀은, 신자의 존재가 곧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며, 사랑은 하나님과 연합된 자의 내적 본질이 됩니다.

결국 성경 전체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며, 성령 안에 사는 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이는 단지 인간적 도덕의 계발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맺는 자연스러운 결실입니다. 성령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게 하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품게 하고, 오래 참지 못할 상황에서 오래 참게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방식이며,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 – 성화의 열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시선을 열어줍니다. 그는 인간 내면의 도덕적 성취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철저히 성령께서 신자의 삶 속에 ‘맺게 하시는’ 결과입니다. 사랑은 선택과 결단 이전에, 내면에서 자라나는 ‘열매’입니다. 그것은 씨앗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심으시고, 시간 속에서 자라나며, 마침내 삶으로 나타나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바울이 ‘열매’(καρπός, 카르포스)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육체의 일들(ἔργα, 에르가)이란 단어는 인간의 행위, 곧 ‘작업’이나 ‘행동’의 산물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노력이며, 분열과 파괴의 결과를 낳습니다. 반면, ‘열매’는 유기적이고 생명적이며 내적 본성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께서 자라게 하시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은 성화의 본질로 연결됩니다. 성화(Sanctification)란 성령께서 믿는 자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과정이며, 그 결과로 맺어지는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화의 시작이자 끝이며, 성화의 증거이자 본질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3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합니다. 그 거룩함은 결국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닮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성화란 곧 사랑으로 자라나는 삶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성령의 열매를 설명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되고, 떨어져 있으면 마를 뿐입니다. 이는 성령 안에 거하는 자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신자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거할 때만 참된 사랑을 삶 속에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랑은 '성령 충만의 증거’이지, ‘노력의 총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편, 사랑이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은 그것이 단지 한순간의 감정이나 결단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삶 전체를 통과하는 깊은 형질입니다. 오래 참음과 친절, 자기 부인과 희생, 원수 사랑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사랑은 신자의 인격 전체를 변화시키며, 시간 속에서 인내로 맺어집니다. 이것은 곧 사랑이 ‘인내의 산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씨앗을 심고, 기다리며, 기도하고, 성령의 말씀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 동안 열매는 자라고 성숙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구원의 은혜가 실제 삶에 구현되는 성화의 실체입니다. 사랑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내가 성령 안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내는 도장입니다. 참된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지만, 그 어디에서도 감출 수 없습니다. 사랑은 향기이며, 빛이며, 삶의 방향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실 때만 우리는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특성 – 고린도전서 13장과의 연결

성령의 열매 중 첫째인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도 깊이 있게 묘사한 성경 본문은 단연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흔히 ‘사랑장’이라 불리는 이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영적 은사를 바로잡는 문맥 속에서 등장합니다. 그는 분열과 경쟁, 자랑과 과시로 가득 찼던 공동체에 사랑의 본질을 선포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해도, 예언을 해도,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며, 전 재산을 나누고 심지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줘도 무익하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곧 사랑이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모든 은사와 행위의 가치와 실체를 결정짓는 기준임을 뜻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사랑의 15가지 특성을 나열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로 맺습니다. 이 목록은 단순한 수사적 장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어가시는 사랑의 열매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랑의 열매 묘사’입니다.

먼저, ‘사랑은 오래 참고’(μακροθυμεῖ)는 단순히 인내심이 많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상대방의 반복적인 실수나 모욕을 감내하면서도 그를 향한 애정을 놓지 않는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이스라엘을 ‘오래 참으셨듯이’, 성령 안에 있는 사랑은 참는 것을 미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삼습니다. 이 인내는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사랑은 온유하며’(χρηστεύεται)는 거칠거나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상대를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성령의 또 다른 열매인 ‘자비’(χρηστότης)와 같은 어근을 사용하고 있기에, 고전 13장의 사랑은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 목록 전체와 긴밀히 연동됩니다. 곧, 고전 13장의 사랑은 갈라디아서 5장의 사랑을 해석하고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등의 부정적 표현들은 사랑이 부패한 자아로부터 벗어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참된 사랑은 비교하거나 이기적인 승부를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남을 세우는 데 목적을 둡니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조건과 대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랑은 은밀하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표현은 마지막 네 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πάντα στέγει), 모든 것을 믿으며(πάντα πιστεύει), 모든 것을 바라며(πάντα ἐλπίζει),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πάντα ὑπομένει).” 이 반복적인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포용력과 경계 없는 헌신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자에게 가능한 현실입니다. 이 네 가지 특성은 ‘참음–믿음–소망–견딤’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통해, 사랑이야말로 믿음과 소망을 감싸는 가장 위대한 실재임을 보여줍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마지막 절인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선언은, 사랑이 단지 ‘첫째’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오래 남고 가장 깊이 우리를 하나님과 닮게 만드는 성품이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사랑은 믿음보다 크고, 소망보다 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닮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사랑 –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결코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해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한 맥락 역시, 육체의 일로 인한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은 반드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며, 그 중심에 사랑이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를 보면, 사랑의 결핍이 교회 내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바울은 직접 목격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가르침 등 다양한 영적 은사들이 나타났지만, 정작 그 안에는 자랑과 분열, 경쟁과 질투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에 대해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의 어린아이”라고 책망하며, 그 해답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사랑은 교회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깊은 기둥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를 돌보고 세워가야 할 원리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유기체입니다. 그리고 그 유기체를 연결시키는 조직적 원소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몸은 흩어지고, 기능은 충돌하며, 유기적 성장은 멈추게 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14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마치 다양한 옷을 하나로 묶는 띠와 같아, 겸손, 온유, 인내, 용서라는 덕목들을 통합하고 완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은 덕목을 덕으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덕을 살아 있는 관계로, 생명의 소통으로 변모시킵니다.

사랑이 교회 안에서 실현될 때, 그 공동체는 단지 바른 교리를 가진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무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공동체, 서로를 예수처럼 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도 ‘사랑의 공동체’로 불리는 교회. 이것이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사랑은 교회를 세우고, 나아가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증거하게 합니다.


묵상과 적용 – 오늘의 신자에게 주는 사랑의 열매

오늘 우리는 사랑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빠르게 식고, 쉽게 배신당하며, 종종 자기 중심적 욕망의 포장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 더욱 깊은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이며, 오직 성령 안에 거하는 자만이 맺을 수 있는 하늘로부터 오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려 애쓰지만 쉽게 지치고 실망합니다. 때로는 용서가 되지 않고, 상대를 품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한계 앞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사랑을 맺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성령의 열매란 결국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을 때 자연스레 맺히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애씀이 아니라 거함에서 비롯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맺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성령의 내적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 머무르며, 성령께서 나를 빚으시도록 내어드릴 때, 사랑은 우리의 뜻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열매 맺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감정이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인내로, 때로는 눈물로 나타나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야말로 하늘에서 자란 열매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결단해야 합니다.
– 나는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 내 사랑은 조건적인가, 무조건적인가?
– 나의 인내는 계산된 것인가, 성령께서 맺으신 것인가?

성령의 사랑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합니다. 사랑이란 결국 자기 부인과 죽음을 통과한 부활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악 속에서 증명된 자리이며, 성령의 사랑은 그 사랑을 오늘 우리의 삶으로 실현하게 하시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라게 하신 사랑으로,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살아내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감정이 아니라 인격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결국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복음의 향기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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