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9가지 열매 3) 화평(εἰρήνη)
성령의 열매, 그 세 번째 – 화평(εἰρήνη)
1. 서론: 평화가 사라진 시대, 성령이 주시는 평화
오늘날 우리는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전쟁, 분열, 갈등, 분노, 해체의 소식이 가득하고, 가정과 공동체,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참된 평화는 드물게 느껴집니다. 겉으로는 조용한 것 같지만 내면은 흔들리고 있고, 침묵 아래에는 분노가 쌓여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진정한 ‘화평’의 본질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갈라디아서 5:22이 주는 선언은 놀랍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화평이라.” 바울은 여기서 ‘화평’을 단순한 무분별한 화해나 온순한 태도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평은 성령이 맺으시는 인격적 열매이며, 하나님의 본성과 나라를 드러내는 영적 질서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평강’은 바로 ‘화평’과 같은 단어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구성하는 본질입니다. 즉, 성령의 화평은 단지 ‘분쟁 없음’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누리는 깊은 안정과 조화의 상태입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의 ‘혼돈’(tohu) 위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임했을 때처럼, 혼란 속에서 다시 드러나는 하늘의 질서입니다.
바울이 ‘화평’을 성령의 열매 중 세 번째로 언급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이 뿌리라면, 희락은 그 생명력이고, 화평은 그 생명이 자리 잡는 공간이며 방향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기쁨을 누리며, 기쁨을 누리는 자는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오직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2. 원어 주해: εἰρήνη (에이레네)의 뜻과 신학적 의미
‘화평’은 갈라디아서 5:22에서 헬라어로 **εἰρήνη (eirēnē)**라 쓰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전쟁의 부재’를 의미하는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성경에서는 철저히 구약의 샬롬(שָׁלוֹם, shalom) 개념을 계승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에이레네’는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전인적이고 관계적인 평강을 뜻합니다.
구약에서 ‘샬롬’은 단지 싸움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온전함’, ‘완전함’, ‘화목함’,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민수기 6장 제사장의 축복에서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평강(샬롬)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할 때의 평강은, 하나님의 얼굴 곧 그 임재와 인격적 관계로부터 비롯된 전인적 안정과 생명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εἰρήνη는 바로 이 샬롬의 신학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사용됩니다. 에이레네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reconciliation)의 상태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존재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로마서 5:1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화평은 곧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2:14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 부릅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시고, 자기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들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에이레네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다름의 통합, 원수됨의 종식, 공동체의 재탄생을 의미합니다. 이 평화는 타협이나 조율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죽음과 부활의 질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바울이 로마서 15:13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쁨’과 ‘평강’이 병렬되는 구조는, 희락과 화평이 성령의 열매로서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쁨을 낳고, 그 기쁨은 평화를 심으며, 평화는 곧 하나님 나라의 공간을 여는 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에이레네는 단순한 감정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신자의 인격과 공동체에 실현될 때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이 화평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맺히는 열매이며, 우리의 내면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성경 전체 속 화평의 통일성과 흐름
성경을 꿰뚫는 하나의 중심 동사를 찾는다면 그것은 ‘구원하다’일 것이고, 중심 명사를 찾는다면 ‘샬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혼돈을 질서로, 무를 유로, 분리를 통일로 바꾸시는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의 창조 자체가 ‘샬롬의 질서’를 세우는 사건이었습니다. 흑암과 공허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빛과 물, 생명과 시간, 그리고 인간 공동체가 평화롭게 배열되었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주어지는 질서와 조화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이 샬롬을 깨뜨렸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는 하나님과의 단절, 자기 자신과의 갈등, 타인과의 불화, 자연과의 대립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역사란 바로 이 깨어진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집요한 구속 이야기입니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단순한 정치적 평화를 넘어서, 정의와 공의 위에 세워진 샬롬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평강의 왕”(사 9:6)으로 소개합니다. 그가 다스릴 나라는 “끝이 없는 평강”(9:7)으로 가득할 것이며, 그 통치는 정의와 공의로 견고할 것입니다. 이사야 32:17은 “공의의 열매는 평강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이 윤리적 감정이 아니라 구속사적 통치의 결과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다스리실 때, 그 열매는 곧 평화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분은 오셔서 갈등과 분열, 죄의 장벽을 허무시고, 십자가로 평화를 이루신 분이십니다(엡 2:14).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5:9)고 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다툼을 중재하는 사람을 넘어,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사람, 곧 성령의 열매로 화평을 살아내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의 공생애는 ‘샬롬’을 회복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외면당한 자를 품으시며 “평안히 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의 손이 닿는 곳마다 평화가 임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죄와 죽음을 이기신 메시아가 허락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평화를 교회론과 성령론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골로새서 3:15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주장한다’는 말은 원어로 ἡγεσθώ(hegésthō)이며, 이는 ‘심판하다’, ‘결정하다’는 의미입니다. 곧, 신자의 판단과 감정과 행위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성경 전체는 깨어진 샬롬을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 새롭게 완성되고, 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샬롬의 공간으로 성취됩니다. 이 흐름 안에서, 성령의 열매로 맺히는 화평은 단순히 도덕적 인내가 아니라, 구속사의 은혜를 현재화하는 표지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 – 성화의 열매로서의 평화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단지 외적 상황의 조용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신자의 내면에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질서와 조화의 상태이며, 성화의 과정 속에서 자라나는 거룩한 성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시작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시고, 그 화목이 점점 우리의 관계와 일상 속에 화평의 성격으로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성화(Sanctification)는 단지 도덕적 성숙이나 자기 통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가는 실재적 변화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며(롬 15:3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 2:14). 그러므로 성화된 자는 그 본성상 화평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그 변화는 고요한 영혼의 평안에서 시작하지만,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을 이루려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용서가 필요한 자리에서 화평은 갈등을 덮는 침묵이 아니라, 진실과 은혜로 대면하는 용기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분노하지 않고,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정죄하지 않으며, 다름을 끌어안는 인내가 바로 성령께서 빚으시는 평화의 인격입니다. 이것은 본성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말씀을 비추시고, 기도의 자리에서 마음을 깨뜨리시며, 공동체 안에서 자기를 낮추게 하실 때, 화평은 열매로 맺히기 시작합니다.
또한 성령의 화평은 ‘내적 평안’과 ‘관계적 화해’를 통합합니다. 요한복음 14:27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며, 오직 성령의 임재로만 주어지는 ‘예수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마음의 고요함을 주지만, 동시에 화평하게 하는 자로 부르심 받은 사명의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8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은 화평이 쉬운 일이 아님을 전제합니다. 성화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갈등과 고통, 오해와 불신, 무너진 관계의 복원 속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만 자라나는 열매입니다. 곧, 화평은 타협이 아니라 거룩한 싸움이며, 기도 속에서 체득되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화평은 나 자신 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자연스럽게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으로 흘러갑니다. 그것은 언어와 표정과 행동에 스며들고, 다툼을 잠재우며, 갈라진 마음들을 잇는 거룩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성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화평은 그 성화의 가장 뚜렷한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화평의 사람으로 빚어주소서.”
화평의 특성 – 산상수훈, 서신서, 예언서의 조명 속에서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단순한 외적 조용함이나, 갈등을 회피하는 무사안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정돈, 즉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인격과 공동체 안에 구현해내는 적극적 덕목입니다. 성경은 이 화평이 어떻게 삶으로 구체화되는지를 여러 관점에서 드러냅니다. 특별히 산상수훈, 사도적 서신, 예언자의 선언은 이 화평이 감정이 아닌 행동이며, 태도가 아닌 실천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 5:9)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화평하게 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εἰρηνοποιοί(eirēnopoioi)이며, 단순히 평화로운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 평화를 창조하는 자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세우셨듯이, 신자 역시 갈등과 혼란, 무너짐과 어둠 속에서 하늘의 평화를 세상에 가져오는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매우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를 요구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4:19에서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표현은 διώκω(디오코)로, ‘쫓다’, ‘격렬하게 추구하다’는 뜻입니다. 즉, 화평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상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붙잡고 나아가야 할 목표입니다. 신자는 화평을 위해 자기를 낮추고, 손해를 감수하고, 때로는 침묵하며, 끝까지 화해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야고보서 3:17–18도 화평의 열매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기서 야고보는 참된 지혜의 본질이 ‘화평’임을 강조하며, 화평의 실천이 곧 의의 열매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성령의 화평이 지혜와 의의 결정체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서 반드시 맺혀야 할 실천적 열매임을 시사합니다.
구약 예언서에서도 화평은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통치가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눕는”(사 11:6–9) 평화의 시대로 묘사됩니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이 “평강이 없다 하나 평강이 있으리라 말한다”(렘 6:14)고 고발합니다. 이것은 참된 평화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성령의 화평은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에서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또한, 성령의 화평은 타협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4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역설처럼 들리지만, 사실 참된 화평은 먼저 진리로 인한 분열과 고통을 통과해야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불의와 죄에 눈감는 평화는 가짜입니다. 성령의 화평은 회개를 전제로 하고, 십자가를 통과하며, 진리로 수립됩니다.
결국 성령께서 맺으시는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시작되어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통합을 이루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갈등을 소멸시키는 전방위적 평화의 확산 운동입니다. 그것은 입술의 언어가 아니라, 겸손과 인내, 지혜와 용서로 짜여진 성령의 옷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입혀져야 할 의의 옷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화평 –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이루는 질서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단지 개인의 심령에 머무는 정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질서와 관계의 형태로 드러나야 하는 열매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이며, 그 본질은 사랑과 희락, 그리고 화평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잇는 유대이며, 희락은 공동체의 분위기이고, 화평은 그 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 질서와 방향성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3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평안의 매는 줄’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끈입니다. 신자 각자가 성령의 열매로 화평을 품고 있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머금는 구조물이 됩니다. 반면, 화평이 무너지면 아무리 교리가 정통하고, 프로그램이 훌륭해도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소멸되고 맙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문맥 역시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가 공동체의 질서와 불질서를 대조하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육체의 일들은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 등으로 나타나며, 성령의 열매는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 양선”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가 관계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초기교회는 ‘하나 됨’이 가장 중요한 복음적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성령 충만함 속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화평이 단지 덕목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통치 원리임을 말해줍니다. 화평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 지체가 조화를 이루며 기능하도록 만드는 성령의 질서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 안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원한다면, 먼저 화평의 열매를 회복해야 합니다. 화평 없는 교회는 외적으로 성공할지 몰라도, 성령은 거기 머물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기뻐하시는 곳은 언제나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가 흐르는 공간입니다. 교회의 회복은 곧 화평의 회복이며, 그것은 모든 성도가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릴 때 가능해집니다.
묵상과 적용 – 오늘의 신자에게 주는 화평의 열매
우리는 갈등과 긴장, 다툼과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내면은 불안으로 요동치고, 가정은 상처로 얼룩지며, 교회마저 때로는 소리 없는 전쟁터가 됩니다. 이런 시대에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단지 선택할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 반드시 맺혀야 할 거룩한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화평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화평은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완벽히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상처 입은 채로라도 화평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곧, 화평은 신자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인격의 향기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하고, 기뻐하고, 화평을 만들어내는 삶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화평은 마음의 평안에서 시작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직면하고도 그 속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심어가는 용기입니다. 화평은 침묵이 아니라 대면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인내이며, 억지 화해가 아니라 진리를 따라가는 사랑입니다. 때로는 먼저 사과하고, 때로는 설명하지 않고 용서하며, 때로는 미움 속에서도 기도함으로 화평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령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나를 화평의 사람으로 빚어주소서. 내 안의 분노와 두려움을 성령의 질서로 정돈하시고, 가정과 교회, 직장에서 나를 통해 주님의 평화를 흘려보내게 하소서.”
이 기도는 단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기도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화평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말로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화평이라는 방식으로 살아내는 복음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화평은,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며, 가장 아름다운 순종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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