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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1–7 강해 가난한 자를 택하신 하나님

샤마임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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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는 믿음, 영광의 주 앞에 선 신자의 태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대하는 태도에 대해 날카롭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외모나 배경에 따른 차별이 복음의 본질에 어긋나며, 특히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유대적 전통과 구속사적 관점 속에서 깊이 묵상하며, 성도로서 어떤 자세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1. 믿음과 차별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1)

야고보는 사랑의 어조로 ‘내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신앙공동체를 향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이어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명제를 던집니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의 주’(τῆς δόξης, tēs doxēs)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되는 표현이며(출 24:16, 사 6:1–3),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지닌 분임을 선포하는 고백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떤 사람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차별하다’(προσωπολημψία, prosōpolēmpsia)는 문자 그대로 ‘얼굴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헬라어와 히브리어 모두에서 외모나 사회적 지위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레위기 19장 15절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외모로 사람을 보지 말라”는 율법과 직결되며,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는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진리를 거듭 강조합니다(롬 2:11).

칼빈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인간의 차이를 무너뜨리는 평등의 복음”이라고 강조합니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또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반드시 차별을 거부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2. 교회 안에서 드러난 차별의 사례 (2:2–4)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2:2)

야고보는 실질적인 예시를 통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현실을 지적합니다. ‘회당’(συναγωγὴν, synagōgēn)은 초기 교회의 예배 장소로 사용된 유대적 배경을 반영하며,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금 가락지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를 상징하며,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자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은 본능적으로 부유한 자에게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라고 하며(2:3),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성과 존재 가치를 구분 짓는 말이며, 실질적 차별을 드러냅니다.

야고보는 이 모습을 두고 “너희끼리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4)라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악한 생각’(διαλογισμοὶ πονηροί, dialogismoi ponēroi)은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부패한 동기를 의미하며, 이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15:19에서 언급하신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루터는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기에, 그 안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사회적 구조나 계급을 그대로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 된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3. 가난한 자를 택하신 하나님의 선택 (2:5–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으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2:5)

야고보는 다시 한 번 사랑의 호소로 말을 이어갑니다. ‘들으라’(ἀκούσατε, akousate)는 선지자적 외침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순종하라는 요청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선택이 부요한 자가 아닌 ‘세상에서 가난한 자’에게 향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마태복음 5:3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πλουσίους ἐν πίστει, plousious en pistei)는 단순히 물질이 아닌, 영적 유산의 풍요함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약속된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 나라이며, 궁극적인 구속사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창 17:8)과 신약의 유업 개념(갈 3:29)과 연결되어, 가난한 자도 하나님의 유업을 함께 누릴 공동상속자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성도들은 오히려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부자들을 더 높이 평가하며, 그들로부터 칭찬과 영향력을 기대합니다. 야고보는 반문합니다. “부자들이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일컬어진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2:6–7)

여기서 ‘아름다운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뜻합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부유한 자들은 종종 이 이름을 조롱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여전히 세상의 기준을 따라 그들을 높인다면, 이는 복음의 정체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멸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거스르는 행위”라 하였고, 어거스틴은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며 신자의 본분을 강조했습니다.

결론: 교회는 차별 없는 복음의 증언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야고보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얼마나 세상의 가치 기준을 교회 안에 들여와 재단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시고, 믿음으로 부하게 하시며,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며,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는 공동체의 모습이며, 영광의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야고보서 2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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