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윌리엄 윌리몬 / 정다운 옮김 / 비아

샤마임 2021. 4. 16.
반응형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윌리엄 윌리몬 / 정다운 옮김 / 비아

 



성찬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경박(輕薄)으로 인한 영혼의 탈진이다. 성찬을 집례하는 목사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성찬식을 장난 식으로 하지 말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아무리 개신교, 특히 장로교가 의식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일부의 교회에서는 성찬을 장엄하게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진지함 또한 피상성을 피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장로교 자체가 성찬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찬의 피상성은 청교도 시대 이후 점진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들이 성찬을 경시하거나 무시했다는 말이 아니다. 불가피하게 말씀 중심의 신앙관은 성찬을 무의식적으로 도외시 시킨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한국 장로교는 피상적을 너머 경박 수준에 다다랐다. ‘저희 교회는 그렇지 않는데요?’라고 반문할지 모르나 그 반문 속에는 성찬에 대한 신학적 깊이와 묵상이 적은 탓도 적지 않다. 즉 단 한 번도 성찬에 대해 깊이 고민하거나 신학적으로 숙고하지 않은 탓에 경박에 가까운 성찬식을 접하면서도 ‘은혜롭다’ 여긴다. 필자가 너무 비판적으로 보다고 말할 수 있으나 25년 넘게 교회사역을 해온 목사로서의 관점으로 판단한 것이다. 한국 장로교의 경우 성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루터와 츠빙글리 성찬 논쟁이 전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교회에서 성찬은 예배의 본질이었는데 교회사 속에서 교리논쟁으로 전락해 버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성찬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의 협소한 편견일까? 아니면 예배 회복을 위한 필수불가결함은 아닐까? 필자는 후자라고 감히 생각한다.


서평가는 책에 대해 과도한 감정적 평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윌리엄 윌리몬의 책은 이 책이 세 번째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공저한 <십계명>을 처음 읽었고, 2020년 3월에 출간된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을 두 번째로 읽었다. 필자의 기억이 흐릿한 탓에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는 읽었는지 확실치가 않다. 작년 세례식을 다룬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을 읽었을 때 너무 놀라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싶어 저자 탐색을 시도했다. 그 전에 읽었음도 저자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탓에 윌리엄 윌리몬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축적되지 않았던 것이다. 작년 이맘때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의 서평 시작문을 이렇게 작성했다.


“매력적 필체의 저자는 누구일까? 몇 페이지를 읽지 않았는데 얼마되지 않은 문장으로 설레게 한 저자가 궁금했다. 탁월한 안목과 매력적인 필체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저자를 만나는 것은 독자로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윌리엄 윌리몬이 그렇다.”


이 번 책도 동일한 설렘으로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막을 길이 없다. 필자의 생각이 과하다고 생각되면 다음 문장을 읽어보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회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그 구원의 사건을 현재에 시연합니다.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가 담긴 음식을 먹으며, 과거는 현재가 됩니다. 그렇게 현세대 또한 이집트 탈출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19쪽)


저자는 만찬을 이야기로 시작한다. 식탁에 둘러 앉아 가족, 또는 친구끼리 대화를 시작한다. 유월절 예식을 치르는 유대인들도 그랬다. 대화는 지극히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중대한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식탁의 대화가 서먹서먹한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 주기도하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18쪽)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을 하면서 서로 대화한다. 그 대화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시킴으로 유월절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 하여금 유월절 사건 속으로 초대한다.


외부의 관찰자는 빵과 포도주를 그저 빵과 포도주로 이해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을 가리키는 상징’(40쪽)이었다. 성찬은 관계가 형성될 때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께서 인격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54쪽)고 말한다. 예수의 임재는 관념적이지 않으며 피상적이도 않다. 실재로 임재하신다.


성찬은 잔치다. 우리는 성찬이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 나라의 잔치임을 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음식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심은 생존하고 쾌락을 얻는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물이며 음식이라 선언하신다. 바리새인들이 금하지 않는다고 비판할 때 지금은 먹고 즐길 때라 답하신다. 바울은 우상의 음식에 대해서 조언할 때 모든 음식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음을 상기 시킨다.(고전10장) 디모데에게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딛전 4:4)다고 조언한다. 우리의 일상적 만찬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인 것이다.


“아침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일하다 먹는 한낮의 간식, 목초 더미를 벤 뒤 먹는 샌드위치, 저녁 식탁에 함께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식사, 이 모두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자리는 주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는 자리이며, 그 영광에 응답함으로 우리는 그 영광에 참여합니다. 감사함과 기쁨으로 먹고 마시는 모든 일이 성찬이 될 수 있습니다.”(82쪽)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행위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행위이다. 성찬 역시 그 자체로 거룩한 행위이자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구원사적 행위이다. 구원은 단회적인 동시에 여정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마지막 만찬에 참여할 준비를 한다. 작은 쉬운 책인데 읽다보면 깊고 넓은 만찬의 세계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모른다. 모든 글과 내용을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욕심 때문이리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진심으로


[밑줄 친 문장]


누군가를 식탁에 초대한다는 것은 그를 환대한다는 최상의 징표입니다. 24

 

외부에 있는 무심한 관찰자의 눈에 성찬에서 나누는 빵과 포도주는 그저 빵과 포도주일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빵이 오래도록 전해져 온,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40

 

식사를 하는 식탁은 친밀하고 거룩하며 변혁적이고도 신비로운 장소입니다. 88


목회적 돌봄의 모든 행위는 본질상 배고픈 이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141


그분은 꼬르륵대는, 불만족스러운, 우리의 텅 빈 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식사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먹이라는 책무를 주십니다. 우리의 무능함, 비겁함, 탐욕,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양을 먹이라. 146

 

 

 

[갓피플몰]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mall.godpeople.com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