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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일곱교회] 7. 라오디게아교회(3:14-22)

샤마임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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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7. 라오디게아교회(3:14-22)

 

라오디게아는 일곱 교회 중에서 마지막 교회에 속하면서 주님께서 칭찬하지 않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책망을 많이 받은 교회로는 사데 교회가 있지만 사데 교회는 비록 죽은 교회이기는 했지만 소수의 성도들이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3:4)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단 한 마디의 칭찬도 없는 책망만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주님께서 위로와 격려를 하지 않으시고 책망만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입니다. 우리는 왜 라오디게아교회가 책망을 받아야 했고, 어떻게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라오디게아(λαοδικεία)는 어떤 곳인가?

 

먼저 라오디게아가 어떤 곳인지 역사 문화적 배경을 살펴봅시다. 라디게아라는 명칭은 셀류큐즈 시대의 통치자였던 안티오쿠스 2세(Antiochus Ⅱ, B.C. 262-246년경)가 주전 261-253년 사이에 이곳을 요새화하면서 자신의 아내이자 여동생인 라오디게(Laodice)의 이름을 도시의 이름으로 명명해 생긴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원 이름은 디오스폴리스 또는 로아스로 불렸습니다. 히에라볼리 남쪽 10㎞, 골로새 서쪽 16㎞ 지점에 자리합니다. 메안더 강 지류인 루커스 강 연안에 위치한 브루기아 주(州)의 교통, 무역,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면직과 모직 산업이 발달했던 도시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히에라볼리는 면직 공업이 발달한 곳으로 라오디게아도 그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검은 양털로 만든 의류들을 만드는 기술이 있어서 주변에 수출하여 많은 부를 획득하기도 합니다. A.D. 17년과 60년경에 큰 지진이 일어났지만 자력으로 복구할 정도로 재력이 많았던 도시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재건을 위해 후원을 했지만 그들의 부로 충분히 재건할 수 있다하여 거절한 한 것입니다.

 

안티오코스 3세 시절에는 잡혀온 7,500명 정도의 유대인들을 라오디게아에 머물게 하여 큰 유대인 정착지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주전 62년에는 라오디게아와 주변의 유대인들이 매해 예루살렘에 보내는 9kg 정도의 금을 탈취 당하기도 할 만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페르시아로 가는 길과 사데로 가는 길, 그리고 빌라델비아로 가는 길이 만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근처에 파묵칼레 온천이 있으며, 온천으로부터 나오는 석회수로인해 산 전체가 섬처럼 하얀 돌로 되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하얀 산처럼 새하얀 목화솜이 많이 재배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독특하게도 라오디게아 지역은 연고로 된 안약이 발달되어 있으며, 안약 제조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한 마디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전 51-50년 사이에 쓰인 길리기아 키케로의 편지들에 의하면 키케로 자신이 라오디게아를 포함하여 주변의 지역들의 사법재판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황체 통치하에서 라오디게아는 브리기아 지방의 중심지였습니다.

 

2.라오디게아에 계시되는 예수님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세 가지 직함으로 소개하십니다.

 

  • 1) 아멘 2) 충성되고 참된 증인 3)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1) 아멘의 예수님

 

아멘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65:16을 인용한 것이 확실합니다.

  • 사 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히브리 원문에는 ‘이트바렉 벨로헤 아멘’으로 ‘그는 아멘의 하나님으로 축복할 것이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70인역에서 ‘τὸν θεὸν τὸν ἀληθινόν’로 번역함으로 아멘을 고유명사가 아닌 ‘성실한’이란 뜻으로 해석해 버렸습니다. 그러느로 ‘진리의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으로 번역함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아멘’은 모든 복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는 것이며, ‘아멘’함으로 확정 짓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구절을 읽어봅시다.

 

  • 민 5:22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를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를 마르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 신 27: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 시 4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아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말씀들에 대해 동의이자 확신이며,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작정을 ‘아멘’ 하시는 분이십니다.

  •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모든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신약에서는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론적으로 이 직함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외에는 관련시킬 수 없는 직함을 그리스도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2)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서의 예수님

 

이제 두 번째 선언으로 가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소개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 ‘증인’은 매우 중요한 사람이며, 성도와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역자로서의 표지로서 나타납니다. 11장에서 두 증인이 등장하며, 19:11에서는 백마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묘사할 때 ‘충신과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19:11에서 공의로 심판하시며 싸우는 백마 탄 분으로 나타나신 것은 충성과 증인이 단지 순교자로 머물지 않고 ‘심판자의 권위를 드러냄으로 회개에 대한 권면의 메시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증인은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3)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바울 서신 가운데 하나님 골로새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정의가 풍성하게 소개됩니다. 골로새서 1:15에서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소개합니다. 16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낳음(πρωτότοκος)’을 입었지만 창조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며,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계 3:14 ἡ ἀρχὴ τῆς κτίσεως τοῦ Θεοῦ

골 1:15 πρωτότοκος πάσης κτίσεως

 

신약 성경 속에서 근본(아르케 ἀρχὴ)은 종종 예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3에서 중요한 구절이 등장하는 데, 이곳에서도 근본(ἀρχὴ)과 창조과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 1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 2 οὗτος ἦν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
  • 3 πάντα δι’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καὶ χωρὶς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οὐδὲ ἕν. ὃ γέγονεν [NA28]

 

 

잠언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함께 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에 나타난 성령 또는 말씀이 신약에서 예수님으로 대입시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잠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근본(ἀρχὴ)이란 표현은 ‘창조주’이심을 드러내려는 의도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강조하시는 걸까요? 이유는 라오디게아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

 

1)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주님의 첫 번째 책망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15절)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미지근한 행위는 주님께서 그들을 토하여 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16절) 우리는 종종 ‘차갑다’와 ‘뜨겁다’에 주목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미지근함’입니다. 즉 모호함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다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화가 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했던 외침과 닮아 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분명하게 선택하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책망했습니다.

 

  • 왕상 18: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많은 학자들은 라오디게아에 대한 주님의 책망을 은유적으로 해석합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남쪽으로 5km 떨어진 뜨거운 광천에서 물을 끌어와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광천에서 라오디게아까지 오다보면 뜨거운 물은 미지근해지고 먹을 수 없을 만큼 좋지 않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비록 마실 수는 었지만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땅이 토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레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레 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레 20: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위의 구절들에서 ‘토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온갖 더럽고 음란하고 악한 삶을 살 때 징계하겠다는 뜻입니다. 만약 구약의 ‘토한다’는 이미지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과 비슷하다며 그들은 지금 깊은 영적 침체와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

 

ㄱ. 잘못된 판단과 무지

 

라오디게아교회의 치명적인 실수는 자시들의 신세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철저히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17절)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기 때문입니다.(17절) 주님은 이러한 상황임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착각은 그들의 판단의 기준이 흐려지고,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철저히 죽었음에고 불구하고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눈먼 것’이라 진단을 통해 그들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18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ㄴ.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주님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진정한 부를 회득해야 합니다. 불은 고난을 상징하며, 금은 믿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겪은 적도 없고, 자신들이 믿음이 어떤 외부적인 요인들로인해 시험당한 적도 없었습니다. 마치 불순물이 가득한 원석과 같습니다. 순수한 정금이 되기 위해서는 불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신약에서 부유함이 타인들에대한 헌신과 사랑, 구제 등으로 나타난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누군가를 위해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유를 나누거나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헨드릭슨 주석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지근 함, 미온적인 태도, 무기력, 망설임, 나약함, 언제나 적당히 타협하고, 무관심과 게으른, 즉 '여기 라오디게아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태도이다.”

 

ㄷ. 흰옷을 입고 수치를 가리라

 

두 번째는 벌거벗은 상태에 있는 그들의 몸을 ‘흰옷’으로 가리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인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사용한 표현들입니다.(사 43:3, 겔 16:36, 23:29, 나훔 3:5 등)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얻은 부가 우상숭배로 인한 결과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죄를 드러내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라는 경고성 권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신약에서 ‘흰옷’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의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즉 말씀대로 살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하여 ‘흰옷을 입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요한계시록 안에도 ‘흰옷’은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흰옷을 입는다는 표현은 미지근한 ‘행위’(15절)의 대안이며,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빛의 갑옷’(롬 13:21)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롬 13:14, 갈 3:27) 것입니다.

 

 ※ [성경속의 색] 흰색

 

 

 

3) 만찬으로의 초대

 

ㄱ. 식교제로의 초대

 

이제 주님은 마지막으로 약속하십니다. 먼저 더불어 먹는 식탁교제로 초대하십니다.

 

  •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말씀과 적지 않게 닮아 있음을 느낍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자신을 ‘문’으로 소개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면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요 10:9) 뿐만 아니라 10에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거하는 자들은 영혼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 앞에 ‘서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토할 것 같은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교회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시기를 갈망하십니다.

 

ㄴ. 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

 

21절에서는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우리가 주님의 보좌에 앉는다는 말은 심판의 권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엡 2:6 에서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무리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부하기를 부자이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하고, 벌거벗었고, 수치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데 교회보다 더 못한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그래도 흰옷을 입는 성도가 몇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아멘이시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하십니다.

 

그들은 부를 위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자처했지만 우상도 함께 섬겼습니다.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역겨웠고 토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선한 영향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풍성한 양식을 먹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치명적인 이유는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빠지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아멘이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걸칠 양다리를 내리고 반석이신 주님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7 교회 주해 및 강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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