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8-46 나사로야 나오너라
요한복음 11:38-46 나사로야 나오너라
[본문]
- 요한복음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 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 요한복음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요한복음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한복음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요한복음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 요한복음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묵상]
돌을 옮겨 놓으라
'다시 속으로 비통이 여기사' 이 대목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인간의 불신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주님은 비통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뒤로 물러나지 않으시고 무덤으로 향해 나아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데 어떻게 마음에 비통함을 느끼냐고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느끼는 비통함은 인간의 죄악 때문이며,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산모의 고통과 같습니다.
- *비통히 여기다(ἐμβριμάομαι) 앞선 묵상을 참조 바랍니다.(묵상 요한복음 11:28-37)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은 무덤 앞으로 나아갑니다. 유대인들은 개인의 무덤을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 가족 무덤으로 사용합니다. 석회암 지역이라 굴을 파고 그곳에 망자들의 시신을 놓고 돌로 막아 놓습니다.
죽음 그리고 무덤, 이것은 정확히 타락한 인류가 맞이하는 종말이며 현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야하고 죽게 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시신이 있는 곳은 부정하며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임을 생명으로 바꾸심으로 부정을 정결로 치환시키십니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갑자기 마르다가 말합니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우리는 앞서 마르다가 상당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돌을 치우라는 말에 주님의 능력이나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냄새나는 무덤을 무엇하러 열라 하느냐고 따져 묻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한계이자 실체입니다. 어쩌면 마르다의 투정은 이 시대의 우리와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입으론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할지 모르지만 현실 앞에서는 깊은 체념과 절망에 휩싸여 살아갑니다. 마르다는 아마 예수님이 나사로를 너무 사랑해 죽은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 부분 본문을 직역하면
ὁ δὲ Ἰησοῦς ἦρεν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ἄνω καὶ εἶπεν Πάτερ, εὐχαριστῶ σοι ὅτι ἤκουσάς μου.
예수 들었다 그의 눈을 위로, 그리고 말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당신이 들어 주신 나의
일단 '말'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어법에 맞추기 위하여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헬라어는 종종 불필요한 설명을 넣지 않으려 명사를 누락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말'은 예수님의 기도를 축소시킵니다. '말'을 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은 예수님의 자체 전체입니다. 하지만 말이 들어가 버리면 언어의 개념으로 축소되어 버립니다. 국어의 어법상 어쩔 수 없다지만 설교자들은 알아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특정 사람의 특정한 말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들으시는 경우에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께 메시지이자 말입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말과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하나의 말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시고 들으시는 메시지요 말이요 기도라는 것 입니다."(김회권_요한복음)
'들어주다'(ἤκουσάς)는 부정 과거 형태로 이미 과거에 들어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42절의 '들어주심은'은 현재형으로 지금도 여전히 들어 주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현재도 응답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하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42절)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나사로는 천을 감싼 채로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죽은 사람이 어찌 음성을 들을까요?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능력이 이미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과 같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없는 것을 부르시니 있게 되고, 죽은 자가 음성을 들으니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면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 사 48:13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나사로는 무덤 밖으로 나왔고 자유케 되었습니다. 마치 에스겔 37장의 해골 뼈의 환상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포로 된 자들을 부르심으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은 이제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려 내십니다.
-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마무리
우리는 종종 화려한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믿음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능력은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일어납니다. 온전히 주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무덤과 같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고, 이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자들을 무덤에서 불러 내십니다. 주님만을 의뢰합니다.
매일 성경 2022년 2월 묵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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