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김동문 / 선율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김동문 / 선율
가짜 뉴스의 시대다. 가짜 뉴스, 즉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없는 이야기를 가공하여 만들어낸 거짓에 세상이 혼돈에 빠지고 있다. 가짜 뉴스는 누군가 악의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고의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문제는 사실이 어떠하든 그 가짜 뉴스가 의도하는 바가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지면 진리처럼 믿고 퍼뜨린다는 점이다. 가짜 뉴스는 곧바로 ‘혐오’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가짜 뉴스의 저의는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비판하고 모함하기 위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혐오하는 대상을 목적으로 자의적(恣意的)으로 거짓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배후에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최근 들어 여성 혐오와 이슬람 혐오가 이상할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에 ㅇ선교단체의 대표가 한국에 이슬람 선교사가 2만 명이나 들어와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괴담으로 알려졌다. 스스로 이슬람 선교사로 자처하는 ㅊ대표의 발언 속에는 이슬람 선교가 아닌 이슬람 혐오가 가득 채워져 있다. 그의 결론은 ‘이슬람은 위험한 사람들이니 한국에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타당한 사실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엇 하나 제대로 밝힌 것은 없고, 주석 없는 추측성 이야기를 조합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즉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에 한국교회가 휘둘리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처럼 지인들에게 퍼다 나르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이 책은 그러한 이슬람을 둘러써 가짜 뉴스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일단 책의 내용은 조목조목 짚어 가보자. 모두 5장으로 구분했다. 1장에서는 막연한 무슬림들에 대한 오해들을 다룬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슬림은 대부분이 잘못된 정보이거나 가짜 정보에 의해 왜곡되어있다. 저자는 이러한 왜곡의 근원을 살피고 사실들을 확인한다. 2장은 무슬림 혐오, 즉 이슬람포비아를 다룬다. 이슬람포비아의 기저는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이슬람포비아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탐색한다. 3장은 제목 그대로 ‘이슬람 괴담 팩트체크’를 시도한다. 이슬람 혐오를 확장 시키고, 더욱 왜곡시키는 근원에 ‘이슬람 괴담’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에 떠도는 이슬람 괴담들의 문제들을 파악하고, 사실을 확인한다. 본론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4장은 다시 무슬림 안으로 눈을 돌린다. 오랫동안 아랍지역에서 활동해온 전문가답게 무슬림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풀어낸다. 마지막 5장은 적용이자 대응이다. 무슬림을 적으로 간주할 것인지, 이웃으로 간주할 것인지 선교적 관점에서 제안한다. 저자는 무슬림을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우리 이웃’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명징한 논리적 순서를 따르지 않지만 그래도 내용을 따라 구분하면, 1장부터 3장까지는 서론과 본론의 역할을 하면서 무슬림에 대한 오해를 풀어낸다. 4장과 5장은 실천과 적용의 차원에서 결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 기독신보에 최바울 선교사의 ‘한국 목회자 선교협의회 '2017 목회자 이슬람 세미나' 개최’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의하면 최바울 선교사는 한국에 이슬람 선교사가 약 2-3만 명이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기사를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특히 최 선교사는 "이슬람 무장 세력이 경쟁적으로 글로벌 지하드에 헌신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 가운데 2005년을 기점으로 이슬람 국제운동이 동아시아 한국으로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이슬람 선교사가 2-3만 명에 달한다"면서 "20년 내에 세계 칼리프 제국 건설을 목표로 맹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통계인지 도무지 밝힐 수가 없다.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 안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근거 없는 가짜 뉴스들이 SNS를 통해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실례로, 2016년에 있었던 이마트 노브랜드가 이슬람에 의해 제작되며, 수입은 IS 테러 집단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외도 이슬람 대학 설립과 할랄 식품 역시 과장되고 왜곡된 가짜 뉴스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슬람 괴담들에 대해 3장에서 조목조목 비판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러한 가짜 뉴스들이 한국교회 안에 사실인 것처럼 확산되는 것일까 의심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이슬람’이 곧 ‘테러’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시기를 2001년 발생할 미국의 911테러로 본다. 저자는 ‘이슬람 극단 주의자들이 미국을 상대로 테러를 일으킴으로써 무슬림에 대한 혐오가 늘어났다.’(77쪽) 물론 이전에도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존재했다. 그러나 911테러는 잠재적이고 비공식적인 이슬람 혐오를 공개적 혐오의 대상으로 만드는데 중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세계 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의 온상을 이슬람으로 지목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슬람과 IS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1997년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출간되면서 사람들은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김영사에서 번역 출간하면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새뮤얼 헌팅턴은 냉전 이후 세계는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발흥하여 적지 않은 소요가 일어날 것으로 보았다. 많은 논란을 가져왔던 이 책은 5장에서 ‘이슬람의 부활’이란 제목으로 이슬람의 확장을 주목했다. 문제는 이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주로 이슬람의 공격에 기독교 문명이 반응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이슬람 확장의 역사에서 다룬 것처럼 이런 문명충돌론의 의견과는 반대로 제국 시대, 정복주의 시대에 이슬람 문명권을 계속 자극했던 것을 오히려 서구 기독교 문명이었고 기독교 제국이었다.”(87쪽)
사람들이 이슬람의 확장에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손에는 꾸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잔인한 정복자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구 학자들은 이러한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지만, 중동 학자와 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화가 평화로운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고 주장’(63쪽) 한다. 즉 피의 정복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와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심리 속에는 이슬람은 곧 칼로 정복하는 잔인한 사람들이란 편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이슬람에 관련된 동영상과 사진 및 괴담들이 사실 확인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무차별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필자가 직접 보았고, 심지어 모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예화로 사용된 ‘나이지리아 목사 순교 현장’이란 동영상은 가짜다. 순교라는 이름을 붙여 만든 가짜 동영상이었다. 그럼에도 이 동영상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으며, 다른 사건들과 짜깁기 되어 이슬람 세력이 주도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이 동영상은 이슬람은 기독교를 핍박하고 소멸시키려는 악의 축처럼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가짜 뉴스와 괴담들에 대해 ‘합리적 의심’(5장 1부)을 촉구한다.
“우리를 둘러싼 부정적 고정관념에 대해 우리는 합리적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진실일까? 그것이 최선일까? 합리적 의심을 갖고 질문하는 용기에서부터 부정적 고정관념을 넘어설 수 있다. 부정적 고정관념을 넘어서야만 혐오와 배제를 넘어설 수 있다.”(227-8쪽)
이러한 동영상을 만든 사람들은 악의적이다. 이 시대는 의심을 권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 언론은 기레기가되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MBC 사태는 기사의 양심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다. 기독교인은 진리의 사람이다. 진리는 사실이고, 사실은 명징하게 드러난 일에 대한 양심의 발현이다. 거짓에 잇대어 진리를 옹호할 수는 없다. 필자는 ‘문명 간이 충돌을 조장하고 자극하고 서로 다투도록 하는 움직임은 악마적인 것이다. 근거 없는 조작 정보로 사람을 조종하고 사실과 상황을 통제하려는 것은 사악한 짓’(255쪽)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슬람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다. 가짜 뉴스에 기대어 견강부회(牽强附會)로 왜곡한다면 이슬람 선교는 불가능하다. 우격다짐으로 그들은 혐오하고 거부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간단다. 먼저 그들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앎은 관심에서 나오고, 과심은 결국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4장에서 ‘혐오와 배제는 머는 첫걸음’으로 무슬림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그들의 세계로 이끈다.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혐오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진정한 만남은 불가능’(184쪽)하다. 기독교는 진리다. 이슬람에 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슬람에 의해 기독교가 점령당하고 내어 쫓김을 당한다고 생각할까? 진리가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이슬람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은 환대하고 반겨야 한다. 진리가 승리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믿는다면 말이다.
우리가 굳이 이슬람을 옹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이유 없이 가짜 뉴스를 양산하고, 확산시켜 혐오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 됨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그들을 품고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 이상 근거 없는 가짜 뉴스에 속아 무슬림을 혐오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어우러져 살아가야’(251쪽)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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