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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따르는 자, 영을 따르는 자

샤마임 201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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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따르는 자, 영을 따르는 자

 

오늘 성경 PSB를 하다 흥미로운 구절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롬8:5절입니다.

개역개정판에 따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개역한글판도 동일한 번역을 따릅니다. 쉬운 성경을 보니 이렇게 번역했더군요.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쉬운 성경이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번역 한 것 같습니다. 다른 번역을 더 봅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NIV판을 보니 아래와 같이 번역했습니다.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sinful nature have their minds set on what that nature desires; but those who live in accordance with the Spirit have their minds set on what the Spirit desires.”

굳이 번역을 하자면

“죄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그들은 본성의 욕망으로 세트 되어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함께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성령의 욕구로 세트되어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간 어설프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뜻을 전달 한 것 같습니다. set를 굳이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달리 번역할 만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입니다. 공동번역은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약간 의역되어 있어서 원뜻을 충분히 살려 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헬라어 원본을 봅시다. 헬라어가 지원되지 않아 캡처해서 올립니다.





번역하기가 약간 에매하기 하지만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적인 생각을, 그러나 영을 따르는 자는 영적인…….”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따르다’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according' 번역했는데 헬라어에서는 카타(κατα)라는 단어입니다. 카타(κατα)는 ‘~에 의한’ ‘~ 통해’를 뜻하는 것으로 수단, 도구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마태복음의 헬라어 이름은 ‘카타 마타이온’입니다. 굳이 번역하면 ‘마태에 의해(기록된)’이란 뜻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롬8:5장을 카타에 중심을 두고 번역을 하면 ‘육신에 의해(통해서) 살면,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고, 영에 의해(통해) 살면 영의 생각을 한다.’가 될 것입니다. 별로 복잡해 보이지도 않아 보이는 분문을 길게 끌고 온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결정짓는 순서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먼저 생각을 바꾸라, 그러면 태도가 바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주장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즉 ‘먼저 태도를 바꿔라 그러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생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려 합니다.

 

극단적인 체험이 중요하다?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은 없나요? 부흥을 하고 나면 마음 큰 변화가 일어나 ‘이번에는 제대로 말씀대로 살아야지!’라고 큰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옛 생활로 다시 되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실망하지만 여러 번 경험하고 나면 그것을 당연하고 생각하고 다시 부흥회와 같은 극적인 체험을 갈망하게 됩니다.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기도하고, 금식기도와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기이한 체험을 쫓아가다보면 일상의 삶을 외면하게 됩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극단적인 체험을 하려고 합니다. 특히 이러한 체험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거나 조용한 설교를 듣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좀 더 자극적이고 강력한 은혜의 체험(?)을 갈망하며 그것들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이러한 삶이 오래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어떤 주부는 기도원을 쫓아다니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아 이혼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학생은 학교생활을 버리고 부흥집회를 이곳저곳 찾아다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먼저 마음이 바뀌고 나면 삶도 바뀌게 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극적인 변화를 당하면 삶은 자연스럽게 바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러한 극적인 체험을 통해 삶이 바뀌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극적인 체험이 삶까지 완전히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체험을 끝없이 갈망하는 생각 속에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헬라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초기 이단 가운데 하나인 영지주의가 이러한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정말 위험한 속임을 발견합니다. 마음만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삶으로 왜곡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악한 것으로, 또는 가치가 낮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태도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본문은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육신의 생각을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생각은 우리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태도를 만들어 내기도하지만, 태도가 행동을 만들어내기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외부의 환경에 의해 인간의 규정된다고 하는 환경결정론자들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 틀린 것도 아닙니다. 환경은 생각과 구별할 필요는 있지만 격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예화에서 보듯, 사람들은 외부의 환경에 의해 지배당하기도 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들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감사합니다’라고 말함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는 말, 더럽고 추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거룩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생각도 중요하지만, 거룩한 태도도 중요합니다.

18세기 조선 후기의 대학자요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하게 서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학문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이 세 가지도 못하면서 다른 일에 힘쓴다면, 비록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고 재주가 있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결국은 발꿈치를 땅에 붙이고 바로 설 수 없어 어긋난 말씨, 잘못된 행동, 도적질, 대악, 이단이나 잡술 등으로 흘러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71쪽, 창비)

 

학문(마음, 내용)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행동과 언어(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잘못된 삶을 살아가면서 올바른 진리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엄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교리서로 구분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칭의와 삶을 구분하지만 분리하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여기서 분명하게 우리가 드려야할 예배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입니다. 즉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삶이 없는 예배는 거짓된 예배요 가짜 예배입니다. 영과 몸은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육신의 삶을 살면 반드시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고, 영적인 삶을 살면 영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태로를 바꾸어 보십시오. 바른 언어를 사용해 보십시오. 잘 되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좋은 태도를 습관화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좋은 생각을 갖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조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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