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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에서의 도피 / 프란시스 쉐퍼 / 김영재 옮김 / 생명의말씀사

샤마임 2019.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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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에서의 도피 / 프란시스 쉐퍼

김영재 옮김 / 생명의말씀사

인간은 타락했다. 종교개혁가들에 의하면 타락은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의 발견과 그로 인한 인간의 재발견이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인간들과 함께함을 선언한다. 칼뱅은 루터를 너머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내재하심을 통한 지성의 조명과 새 언약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인간들의 거룩한 삶을 강조했다. 루터와 칼뱅으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의 핵심은 ‘신성의 세속화’이다.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용어이지만 설명하면 이렇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립된 중세의 ‘은총 대 자연’이란 이분법적 세계관은 근대의 이원론과 흡사하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서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세상에 관심이 없으며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이러한 아퀴나스적 이분법 세계관은 하나님을 과도하게 인간의 삶에서 터부시 함으로 인간의 삶과 역사에 하나님의 의지와 뜻은 길을 잃고 무용지물이 되게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러한 중세적 모순을 종교개혁가들이 해결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 속한 수도원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맹세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평민들도 거룩하다는 것이다. 세계관은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을 무너뜨렸고, 수도원과 일상의 경계를 사라지게 했다. 칼뱅이 직업을 ‘소명’으로 정의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은 제사장이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자요,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 소명받는 자들의 거룩한 일터라는 것이다.

 

개신교회를 출석하는 교인이나 목회자들 중에 위의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단순한 명징함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했고, 또한 계속해서 지불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교회가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면 과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개혁교회는 이미 답을 얻었고,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는 것일까? 프란시스 쉐퍼는 개신교인들이 ‘이성으로부터 도피’했기 때문이라고 응답한다. 쉐퍼는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했고, 왜 그러한 결론을 내렸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쉐퍼가 모든 문제의 발달을 중세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잘한 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신학의 총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핵심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를 ‘자연과 은총’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은총은 상층부에 속한 것으로 신적이 영역이며, 보이는 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이다. 이에 비해 자연은 하층부에 속하며 피조물이며, 땅에 속하는 것들이다. 엄밀히 말해 상층부의 영향 아래 있다고 옳을 것이다. 상층부는 인간 이해로 범접할 수 없는 시공이기 때문에 이성이 아닌 상징으로 표현된다. 아퀴나스는 비록 상층부와 하층부가 구분되고 상당한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양자 간의 통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22쪽)다. 문제는 아퀴나스가 바라본 하층부에서 일어난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지 않았다. 인간을 비록 타락했지만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23쪽) 이 미묘한 인식의 차이는 결국 인간을 절망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아퀴나스가 하층부에 심어놓은 자율적인 인간의 지성은 시간을 따라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쉐퍼는 예술에서 첫 징조를 발견한다. 자율 사상에 최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는 조토 디 본도의 스승 치마부에(1240-1302)이다. 그들은 초월을 상징으로 표현하기보다 ‘자연의 사물을 자연 그대로 그리기 시작했다.’(25쪽) 물론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다. 서서히 천천히 변했다. 단테(1265-1321)는 자연에 몰입한 화가처럼 글을 쓰기 시작한다.(26쪽) 즉 자연에 대한 발견, 그리고 집중이 13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증가한 것이다. 문제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율을 얻은 자연이 ‘은총을 잠식하기 시작’(26쪽)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가 끝나갈 즈음 자연은 은총을 삼켜 버린다. 쉐퍼는 1415년에 제작된 <루앙의 시도서>라는 채색 수사본을 근거로 제시한다. 즉 ‘이 그림은 은총이 훨씬 중요하고 자연을 별로 중요하지’(27쪽)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14010년 북유럽의 반 에이크가 그린 <예수님의 세례>에서는 은총이 아닌 실제의 자연 풍경을 담은 것이다. 1435년, 반 에이크는 <재상 롤랭의 마돈나>를 그린다. 이곳에서 재상 롤랑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가까이 마주 보며 앉아 있다. 이 그림의 핵심은 ‘롤랭이 기도하는 자세로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으나 마리아와 대등하게 그려져 있다’(30쪽)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와서는 상층부에 속한 영혼을 그리려 했지만 그 영혼은 기독교의 영혼이 아니라 바다나 나무와 같은 영혼이었다. 이것으로 자연과 은총은 서로 통일될 수 없는 영역임이 분명해졌다.

 

문제의 해결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보편을 강조한 신플라톤 주의와 개체를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은총과 자연을 통합적으로 보는데 실패했다. 그들의 실패의 기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층부의 자율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깔려있다. 종교개혁가들은 중세의 신학과 철학에 도도하게 흘러온 신플라톤 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율적’(47쪽)이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전적 타락했으며,, 결코 자율적이 못하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그리스도가 행한 사역을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할 때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쉐퍼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오직 성경’(48쪽)이라는 종교개혁가들의 외침을 주의할 것을 당부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을 제시한다. 칼뱅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을 알 때, 인간을 비로소 인간 스스로를 바르게 볼 수 있다.

 

“종교 개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상층부’와 ‘하층부’에 관하여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 즉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참된 진리를 계시로 말씀하시고, 자연, 즉 우주와 인간에 관한 참된 사실도 계시로 말씀하신다.”(51쪽)

 

쉐퍼는 이곳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운다. 그것은 바로 모든 문제의 시작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상층부와 하층부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연과 은총은 두 개의 무엇이 아니었다. 그들은 참된 통일성을 갖고 있었고, 믿음에 근거한 바른 인식은 이러한 통일을 바르게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적 신학에 빠져있던 아퀴나스는 ‘하층부’에 자율에 부여함으로 상층부를 추방시키는 불행의 씨를 심은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에게 ‘자율적인 부분이 전혀 없’(52쪽)다고 선언함으로 통일성을 회복시켰다. 진정한 회복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실재하시고, 인격적인 분이시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만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54쪽) 쉐퍼는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 ‘틈’이 있다고 본다. 또한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도 ‘틈’이 존재한다. 종교개혁가들은 ‘은총’ 뿐 아니라 자연도 동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인류는 또다시 급류를 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쉐퍼는 초기의 근대 과학 사상 속에서 종교개혁 이전의 왜곡된 자율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종교개혁은 근대의 어머니다. 만약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근대는 좀 더 늦추어졌을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의 세계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은 급히 왜곡되어 갔다. 초기 과학자들은 ‘이성적인 우주를 창조하신 이성적인 하나님이 계시고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며 우주의 형상을 발견해 낼 수 있다’(68쪽)는 견해를 견지했다. 그러나 루소와 칸트는 상층부의 문제를 관심 밖의 것으로 팽개쳤다. 자연은 은총을 완전히 삼켰고, 상층부에는 자유만 남겨진다. 그 자유는 ‘구원을 필로 하지 않’을뿐 아니라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71쪽)이다. 그러나 하층부의 자율이 주도권을 쥐자 하층부가 상층부를 완전히 잠식해 버린다.

 

쉐퍼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헤겔이 등장하고, 헤겔의 철학이 ‘절망선’이라고 선언한다. 임마누엘 칸트가 상층부와 하층부의 통합에 실패하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면,, 헤겔은 정립과 반정립과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절망으로 떨어지는 시작일까? 하나님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인간의 우주의 중심에 있고 자율적이라는 것’(83쪽)이다. 그런데 기이하게 희망을 선포한 헤겔이 절망인 것이다. 쉐퍼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절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지식과 삶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바라던 희망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 이제까지 인간이 갈망하던 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절망 가운데 사는 것이다.”(87쪽)

 

그렇다. 더 이상 희망은 없으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사는 것, 그것이 헤겔이 낳은 네피림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가 등장한다. 실존주의 아버지, 케에르케고어(1813-1855)가 그 주인공이다. 일부의 학자들은 완고하게 부정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과 필자가 판단하기에 키에르케고어는 실존주의 아버지가 확실하다. 키에르케고어는 절망을 살아가는 당대인들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고 말하고, 절망이란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도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상층부는 인간의 이성과 이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합리적 이성이란 사다리는 허공에서 끝이 나고 인간을 추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도약해야 한다. 도약의 시작은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도약은 실패한다. 도약은 그 개념 속에 상층부와 하층부 자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관점에서 볼 때 상층부와 하층부는 통합이 불가능한 물과 기름일 뿐이다. 쉐퍼는 실존주의가 이성을 버렸다고 주장한다.

 

“도약이란 실재이지 결코 도약을 표현한 용어가 아니다. 언어 표현, 즉 상징체계는 변할 수 있다. 그 체계가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또는 같은 말을 쓰든 다른 말을 쓰든, 그런 것은 부수적이다. 현대인은 도약함으로써 합리성을 떠나고 이성을 떠나, 상층부에서 해답을 찾는 데 열중한다.”(106쪽)

5장에서는 예술이 어떻게 상층부로 도약하려는 지 탐색한다. 예술 역시 철학과 다르지 않다. 예술은 도약을 ‘미치는 것’(132쪽)으로 상정한다. 실존주의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어머니다. 쉐퍼는 6장에서 신비주의를 다루면서 궁극적으로 통합이 실패했음을 선언한다. 신비주의는 범신론이란 독을 품고 있다. 신비주의를 절대화하는 이들의 일부가 범신론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다. 신비주의는 상당히 종교적이지만 전혀 종교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 인격적이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종교적인 양상일 뿐이다. 이에 비해 범신론은 도약을 왜곡시켜 모든 존재를 신격화하는 우상숭배다. 현대적 신비주의는 상층부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족은 것과 다름없다. 쉐퍼는 이렇게 말한다.

 

“신신학자는 성경에 계시되고 종교 개혁에서 말하는, 유일하고 무한하신 인격적 하나님을 상실했다. 현대적 사고방식을 따르는 자유주의 신학은 대용물로써‘신’이라는 단어만을 소유할 뿐이다.”(139쪽)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을 떠난 인류를 답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에만 바른 ‘통합’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무한의 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나, 인격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152쪽)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된 세계와 사물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은 기계처럼 다루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우리가 합리주의가 아니라 합리성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면 상층부의 하나님과 하층부의 피조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잘못 읽지 않았다면 프란시스 쉐퍼가 말하는 ‘이성에서의 도피’는 세상을 바르게 보려는 ‘노력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쉐퍼의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명징함과 난해함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는 상층부와 하층부의 개념으로 명쾌하게 구분한다. 과도하게 간소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분리가 아니라 구분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 성경은 초월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소개한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세계 역시 존재한다. 인간들은 이것을 은총과 자연, 상층부와 하층부로 구분한다. 인간의 역사는 상층부와 하층부의 통합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자율에 무게중심을 두거나, 통합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율과 자연에 함몰된 그릇된 객관, 비합리적 도약과 불가지론 등이 잘못된 시도들인 것이다.

 

쉐퍼는 인간의 자율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이성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지만 여전히 살아계시고, 인격적으로 피조 세계에 관여하시고 개입하신다. 이러한 지식은 성경에서만 얻을 수 있다. 성경을 떠난 인간의 노력들은 언제나 실패한다. 쉐퍼는 종교개혁가들의 성경관을 통해 바른 통합 원리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인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절대 타자이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시대가 혼탁하고 어지럽다. 다시 바른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지식을 위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아직 도피할 때가 아니다.

 

 

 

[갓피플몰] [개정판] 이성에서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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