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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고린도후서 5장 화목케 하는 직분

샤마임 2020.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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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고린도후서 5장 화목케 하는 직분

 

4장에서는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5장에서는 종말에 일어날 일과 복음 가진 특징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세계로 초대하는 초대장과 같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 즉 복음을 전하는 직책을 화목케하는 직분이라고 소개합니다.

 

1-10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11-21절 화목케 하는 직분

 

1. 1-10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복음의 탁월성은 이 세상의 한계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16-18에서 바울은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말했습니다. 그 새로움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5장을 시작하면서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을 분명, 4장에서 언급한 질그릇으로 표현된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 우리의 운명이 다하면, 우리의 생명을 마치면 이란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후에는 하늘에 있는 집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집은 어떤 집입니까?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며, 하늘에 있습니다.(1절) 마가복음 14:57-58에 의하면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 앞으로 끌고가 거짓증인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막 14:57-58]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여기서 언급되는 있는 말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을 말한는 것입니다. 만약 위의 본문은 고린도후서 말씀에 적용해 본다면 ‘새롭게 완성된 부활의 몸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음 받은 몸’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더욱 분명한 것은 2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즉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덧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4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4절 후반부에서는 정말 멋진 말로 표현합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갈 동안 이 세상에 있지만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10절)에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 때 우리는 모든 행위를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9절에서 바울은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역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을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받을 때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11-21절 화목케 하는 직분

 

5:11로 시작하는 ‘화목케하는 직분’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7:4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중간에 약간씩 다른 이야기도하지만 중요한 것을 바울의 사도직이 죄인들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5장에서는 몇 가지로 나누어 자신의 사도직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사도직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미쳤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정말 미친듯이 일했고, 헌신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한다’라고 말합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억지로 뭔가를 시킨다는 뜻이지만 바울은 그런 의도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나의 삶을 이끈다.’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미친 듯이 일할까요? 너무나 주님이 감사할 때입니다. 그럼 누가 감사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가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합니다. 이 때 어떤 한 여인이 향유를 가져와 깨뜨려 예수님게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고있던 바리새인이 생각합니다. “만약 이 사람(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지금 자신에게 향유를 붓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 것을 알 텐데 왜 이렇게 가만히 있을까? 가짜 일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주님이 바리새인 시몬에게 빚 진자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갚을 것이 없다하며 둘다 탕감해 주었다.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합니다.

[눅 7:41-42]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리고 향유를 붓고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눅]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바울의 열심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일어난 자발적 헌신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설명한 다음 15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줍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뜻은 죄와 육신을 따라 살았던 삶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되어 의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뿐 아니라 본질 자체가 완전히 바뀝니다. 어떻게 하여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18-21절에서 바울은 바로 복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18절)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화목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이 감당함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죄인들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도 충족하게 했습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시작하면서 화목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음입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톰 라이트는 ‘메시아의 사랑이 복음의 전체 주제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역동적이고, 활기입니다. 사랑은 폭발하는 폭탄과 같아 밖으로 품어져 나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강제한다’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허비하여 주님을 섬겼습니다. 왜요?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컷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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