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1)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내일이면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설과 추석이 되면 우리 민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수년 전에 어느 해외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이러한 귀향전쟁을 다큐로 제작하여 방송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귀향전쟁은 근대화로 인한 도시화와 이농현상의 아픈 과거의 추억입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가족끼리 모여 사는 가족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근대화로 인하여 산업 발달하고 농촌이 피폐해지면서 우리는 도시로 도시로 올라와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마산이나 부산 등의 공업단지에 취업해 나갔던 누님이나 형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과자셋트를 들고 왔기 때문에 추석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누나는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기다리다 명절이 되면 양손에 가득 선물을 사들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정든 고향에 돌아가면 보고 싶었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싸리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그러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딸의 목소리를 듣고 정개(부엌)에서 일하시다가 신도신지 않고 버선채 딸에게 달려가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나이라서 반갑지만 표시는 잘하지 않고 ‘왔나?’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집 뒤로 돌아가서 아무도 모르게 힘든 딸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조용히 묵묵하게 우리를 기다리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첫째, 우리 아버지를 부르라.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버지를 부르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단어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단어가 있다면 아버지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며,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그림이 아버지가 없으며, 중고등학교 때 아버지는 돈 벌어다주는 기계로 생각합니다. 유교적 엄격한 아버지상과 현대 미디어의 잘못된 아버지의 모습들은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 '아버지'를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왜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가? 주기도문의 첫단어는 아버지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파르테 휘몬’ 즉 ‘아버지 우리의’입니다. 아버지를 부름으로 우리는 먼저 기도의 대상의 되시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기도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인식할 때 비로소 기도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를 부름으로 경이로운 신앙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모든 기도의 응답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실 때 시작됩니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전능자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상황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신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주후 70-90년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로마의 황제가 되는 티도 장군은 주후 71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제압하면서도 마가복음에서 주님께서 예언하셨듯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완전히 파괴 시켜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기도문을 읽게 된다면 매우 의미심장할 것입니다. 온천지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른다는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언약’을 말하고 주장합니다. 맞습니다. 굳이 김세윤교수의 주장을 빌리지 않아도 아버지는 우리를 책임지시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였습니다.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하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무 애굽에서 불러 내셔서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라는 이 호칭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만들어진 구원사적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온 천지를 다 가지신 하나님, 바로 그분의 오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나라를 상속받을 장자로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 짧고도 단순한 한 마디는 온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요, 인류의 온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위대함 그 자체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십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에는 하늘이 두 가지의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코스모스이고 다른 하나는 우라노스입니다. 코스모스는 질서정연한 우주나 마귀가 다스리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사용된 하늘은 ‘우라노스’인데 이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이며, 우주를 통치하시는 보좌입니다. 낮은 곳에 있으면 잘 보이지 않지만 높은 곳에 오르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뜻합니다. 우리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사정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이 표현 속에는 초월하신 하나님, 절대타자이신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모든 것에 얽매이거나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초월해 계시며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시며,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우주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주가 고장 났는데 하나님께서 우주보다 작다면 하나님은 우주를 고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붙들고 있으며, 고치시고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내재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사랑은 거대한 우주와 오를 수 없는 높은 산에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해변의 작은 모래알과 우리가 모르는 이름 모를 잡초와 미물에게도 미칩니다. 우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면서 내재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 말씀 속에는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아픔과 고통은 아버지를 망각함으로 일어났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찾아 제 멋대로 살아갈 때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헐무트 틸리케 목사님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잊어버리게 되자 인간은 서로 이해하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의심이 생겨나고, 의심에서 반목이 생겨나고, 반목에서 다툼이 생겨나고, 다툼에서 아우를 죽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세상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만과 충동의 홍수가 휩쓸고 간 세상은 온갖 더러운 오물들이 넘쳐나 고약한 냄새가 나고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줄 모르고 하나님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에 계십니다.
※억울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까? 세상에 내편이 단 명도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십니다. 높은 곳에서 이렇게 모두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탕자의 형은 아버지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마6:7-8 /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잊어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사 49:14-16 /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부모는 절대 자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혹시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잊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도 주인을 알고 즉 순종하고,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아들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우리의 필요도 알고 계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는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곧 빈털터리가 되었고 적신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가서 종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영원히 신실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현시대를 일컬어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진 시대라고 말합니다. 오직 자신 만의 이익과 욕망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고전어학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찾아야할 가장 시급한 단어는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극단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며, 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얼마나 깊고 놀라운지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개인으로 구원하셨지만,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왜 공동체가 필요한가? 교회가 필요한가?
1.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섬길 수 있습니다. 나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요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이 언제 가능합니까? 함께 공동체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세상이 언제 교회를 교회답다고 말합니까?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나누며 섬길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우리는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2. 함께할 때 진리를 압니다. 진리를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요일4:7-8 /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3. 함께할 때 세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의견이 달라도, 한 마음으로 합한다면 위대한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며 불신하여 갈라지고 다툼이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을 마음을 합한다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데이빗 왓슨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보다 더 위대함을 증명하는 길은, 끈질긴 사랑으로 우리 주위의 악을 극복할 때 가능하다.” 초대교회는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인종과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와보라’ 이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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