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2. 하나님의 이름
[주기도문 강해] 2. 하나님의 이름
주기도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만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부르는 것은 유대인의 정서상 혁명적인 선언과 같으며,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사야 7:14의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마태복음 1:23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우리와 함께’라는 ‘임마누’와 하나님을 뜻하는 ‘엘’이 합성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의 아하스 왕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이사야의 조언을 거부할 때 하나님은 친히 ‘임마누엘’의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심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학자들의 수많은 논쟁이 있는 본문이긴 하지만, 이 구절이 나타내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핵심입니다. 전통 유대인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하고, 새롭게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소개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주기도문에 등장에 첫 번째 간구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주기도문은 6개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간구
1) 하나님의 이름 2) 하나님의 나라 3) 하나님의 뜻
사람들의 필요에 관한 간구
4) 일용할 양식 5) 우리의 죄악 6) 시험에 들지 않도록
1)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게 하옵소서.
수동태 형으로 된 첫 번째 기도문은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름’을 그 대상과 동일시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대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경솔한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 이름이 뭐냐?’라고 물으면 ‘정현욱’이라고 말하면 안 되고, ‘정자 현자 욱자 되십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이름을 아무렇게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을 모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어른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결코 예의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첫 번째 기도해야할 제목으로 소개하는 것일까요?
ㄱ.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
가장 먼저 ‘이름’은 존재의 속성을 드러내고 규정합니다.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창조된 것들을 ‘명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3) 하면 ‘빛이 있습니다.’ 빛은 있으라 했는데 어둠이 있거나, 나무가 있지 않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명명하신 것은 그 자체로 존재가 됩니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십니다. 이름이 곧 존재가 됩니다.
이름이 지어진다는 것은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름이 지어진다는 것은 생명이 부여되는 것이며, 존재로서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구원된다’라고 말합니다. 이름이 어떻게 구원이 될까요? 쉬운 예로 창세기 11장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타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이 종결된 다음, 그 후에 족보가 소개됩니다. 셈의 족보의 목적은 아브라함을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30에서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라고 소개합니다. 자식 없음은 곧 미래가 없다는 뜻이며,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12장이 시작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습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기록합니다.(창 12:4)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인 부르심, 즉 전도를 통해 부르시는 것을 ‘외적 소명’이라 말하고,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변화 시키는 것을 ‘내적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야’라고 부르실 때 더 이상 문제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구원이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호세아 11:1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의 사건을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을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실 때,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마태는 이러한 호세아서의 부름을 즉각 예수님께 유비시킵니다.
마태복음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생명과 구원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과는 어떤 관계를 가질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다음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그곳에서 십계명을 주십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 계명은 ‘형상’ 즉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망령되다’나는 히브리어 단어는 ‘샤브’인데, ‘헛되다’ ‘가치 없다’ ‘허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1 ‘거짓된 풍성’에서 ‘거짓된’이 바로 ‘샤브’라는 단어입니다. 욥기 35:13에서는 ‘헛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시편 31:6에서는 우상숭배의 ‘헛됨’에 대해서 언급할 때 샤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은 ‘아무런 힘도 생명도 없는 우상을 대하는 것처럼 불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헛되고 거짓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시작하기 앞서 예수님께서 잘못된 기도들에게 언급하셨습니다. 중언부언하거나, 많은 말을 하는 것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는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인격적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앞에서 아내와 친구와 이야기하듯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의 중심인 6장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의 중심 주제입니다. 기도든, 구제든, 우리의 고민과 걱정이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지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의 행실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모세오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그들을 징계한다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고, 특히 사사기 속에서 반복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이방민족들에게 포로가 되어 그들 가운데 살아갈 때, 이방민족들에게 조롱을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범죄 할 때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겔 36: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겔 36: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의 거룩성을 드러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독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심으로 이방인들의 모욕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십니다. 인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더럽히기만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헐무티 틸리케는 첫 번째 간구를 해석하면서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이제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아버지여, 저는 당신께서 그 빛 문서를 완전히 찢어 버리셨음을 믿습니다. 아버지여, 저는 예수께서 모든 대가를 치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여, 제가 이제 당신의 이름으로 새롭게 자녀가 될 권리를 얻었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옛시대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읽어 보십시오. 그곳에 구약에 속한 사람을 ‘옛사람’으로 또는 ‘들었다’는 과거형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는 제자들에게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며, 새율법의 입법자요 해설자요 성취자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구약의 선지자들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고 했다면, 사도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치유합니다. 이제 세례도 예수의 이름으로 받고(행 2:38)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걷지 못하는 이도 걷게 합니다.(행 3:6)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믿는 이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4-16, 참 요 14:6)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며, 예수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 분만이 우리의 참 생명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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