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인생 경영 (1) 멀리 보는 습관
지혜로운 인생 경영 (1) 멀리 보는 습관
몽골인들의 시력이 4.0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모겐족은 9.0이나 된다고 한다. 2.0만 되어도 최고의 시력으로 인정받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몽골인들은 수백미터 밖의 물건들도 정확하게 구분할 정도록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몽골인들의 시력을 연구하면서 단순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멀리 보는 것'이다. 시력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멀리 봐야 한다는 것이다. 멀리보는 훈련이야말로 최고의 시력을 만드는 비법인 것이다.
그리고 보면 한국인들의 시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이유 중의 하나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보급이다. 현대인들의 이기인 컴퓨터는 생활에 큰 보탬을 주고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로운 면도 적지 않다. 사회성을 약화시키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할 수 없도록 만든다. 특히 컴퓨터와 같은 기기들로 인해 멀리 보지 못하고 가까운 곳만을 집중하여 본 나머니 시력은 점점 약해지고 만 것이다. 시력의 약화는 도시생활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농업과 산촌의 삶은 멀리보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도시는 사방이 마천루에 가리워져 있으며, 시계는 불과 몇십미터를 넘어가지 못한다. 창문을 열어도 고작해야 몇 미터 밖의 모습 밖에는 볼 수 없다. 멀리보는 훈련을 하지 못함으로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경영에 있어서도 멀리보는 훈련은 중요하다. 가까운 것만 보려는 근시안적 사고야말로 인생의 가장 해로운 적이 아닐 수 없다. 가까이 있는 언덕이 커보이는 것은 자연이치다. 지나고보면 언덕은 말그대로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언덕 너머를 보지못함으로 길을 잃고 만다. 산에서 길으면 산악인들은 주변에서 높은 산으로 다시 올라간다고 한다. 주변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향을 잡은 다음 다시 내려와 가던 길을 가면 크게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는다. 중국 송대의 소동파 시인은 제서림벽은 여산을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각기 다르구나.
여산의 참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
단지 내가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이리라. 1
산 속에 있으면 산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산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장기를 둘 때도 장기를 두는 자신보다는 옆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걸음 뒤로 물러나 봐야 한다. 그래야 나무가 아닌 산을 보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앞에 있는 작은 이익과 욕망을 탐하는 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나라가 타락하는 이유는 관리들이 작은 이익을 탐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전체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함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탐관오리'라고 말한다.
스탠퍼트 대학의 월터 미셀교수가 했던 '마시멜로 실험'이 있다. 4살짜리 아이들에게 마시멜로 나누어 주었다. 먹지 않고 15분을 참으면 한 개 더 주기로 했다. 실험결과 1/3은 15분을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었다. 그후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관찰한 결과 15분을 참지 못한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눈 앞의 이익을 위해 큰 것을 얻지 못했다. 중국고전인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전국시대 진헌공이 우나라의 길을 빌려 곽나라를 치고자 했다. 전헌공은 우나라에 귀한 보물을 주어 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우나라의 우공은 구슬이 탐이나서 길을 내주고 말았다. 진헌공은 수하의 순식은 괵을 치고 돌아와 몇년 뒤 우나라를 공격하였다. 한비자는 결국 '작은 이익을 사랑할 뿐 그 해를 생각하지 못해서이다'고 말했다. 작은 이익을 돌보는 자는 큰 이익을 해지는 것이 된다. 2
신자의 삶은 영원한 세계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 땅의 사사로움에 사로잡혀 근심과 걱정에 싸여서는 안된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거부할수는 없지만 절제할 수는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님께서 주시는 '본향'을 바라본 사람들이다. 본향을 바라보는 원시적 혜안은 바로 앞의 이익과 영예를 뛰어넘을 수 있게한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역설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사소한 것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자의 영성인 것이다. C. S Lewis는 '영광의 무게'에서 기독교인들이 작은 이익에 관심을 갖고 더 큰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것, 온전한 것들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고 싶지만, 신자들은 이 땅의 물질과 명예와 권련에 만족해 버린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멀리 보자.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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