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와 머리털 / 마태복음 10:28-31
참새와 머리털
마태복음 10:28-31
오이 할매의 계산법
수년 전에 영도에 살 때의 일입니다. 청학동에 있는 청학시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반찬을 하러 오이를 사게 되었습니다. 가게에 들어가니 할매주인이 이렇게 가격을 써 놓았습니다. 오이 한 개에 300원, 천 원에 세 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오이 천원어치 주세요! 나중에 집에 와서 계산해 보니 글쎄 이런 계산법이 어디 있나 황당했습니다. 한 개에 300원이면 세 개면 900원인데, 세 개에 천 원이라고 덜렁 샀으니 손해 본 것이죠. 글씨가 오래되었던 것으로 보니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그렇게 계산하고 오이를 샀을 것을 생각하니 약간은 덜 억울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엉터리 계산을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세 개에 천 원이라는 너무 익숙한 문구 때문에 3개면 900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잘못된 계산을 하면서도 잘못된 계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우리에게 총명을 주셔서 영적 지혜를 얻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민수기 13-14장에 보면 열두 정탐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열 정탐꾼은 정탐 보고를 할 때,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메뚜기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메뚜기 콤플렉스의 이유는 잘못된 계산법 때문입니다. 이들이 아낙 자손과 비교한 대상은 ‘우리는’이란 단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왜 가나안에 들어가는지, 어떻게 해서 들어가는지를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늘 ‘우리는’ 이렇게 계산하니 걱정이 되고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걱정학고 근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은 커 보이고 내 자신은 작아 보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일들이 많습니다. 심리적으로 상대가 두렵고 강인하다고 생각하면 크게 보인다고 합니다. 키가 160이라도 상대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크기 180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럴 때마다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원리, 우리는 참새보다 귀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참새는 미약하고 적은 가치를 뜻합니다. 한 앗사리온의 가치를 계산해 봅시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하루 노동자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고, 한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16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당을 십만 원으로 잡으면 6천 원 정도이고, 5만 원이면 3천 원 정도입니다. 당시는 노농의 가치가 적기 때문에 하루 5만 원으로 잡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참새 두 마리의 가격은 3,000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풀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 가격은 약 1500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두 마리의 참새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너희가 간식삼아 먹는 가치가 매우 적은 참새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의 내용이 세상 속에서 핍박받는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참새는 어쩌면 세상 속에서 핍박을 받는 제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즉 이렇게 말씀을 풀 수 있습니다.
“너희가 간식으로 먹는 하찮은 존재인 참새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하물며 너희를 하늘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걱정 말고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은 31절을 분명해 보입니다.
마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간단하지만 분명합니다. 우리는 분명 참새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볼 때 별 볼일 없고 하찮은 존재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눈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으로 나의 관점으로 세상과 대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세상을 대면하시가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원리는 머리털 계산법입니다.
30절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들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반복이면서 점진적 강조입니다. 너희들이 가치가 적다고 생각하는 참새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실 정도로 너희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카락 개수를 세보시분 있습니까? 아니.. 셀 수 있는 분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갑자기 사람의 머리카락의 개수는 얼마나 될까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재미난 몇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사람의 머리카락 개수는 적게는 8만에서 많게는 10만 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은 15만 개까지 된다고 합니다. 머리카락은 하루에 50개 정도가 빠지고, 나이가 들어도 새로 난다고 합니다. 그럼 머리가 하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애들이 속을 썩여서 그럽니다! 농담입니다. 머리에 바람이 들어가서 그런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강한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갑자기 흰색으로 바뀌는 수고 있으니 조심하시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만 개나 되는 머리카락 수를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머리카락, 명예로서의 의미
그러나 머리카락을 단순한 관심의 정도를 넘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머리털이 가지는 의미는 현대와 사뭇 달랐습니다. 구약시대에 머리카락은 육체적인 힘과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머리채를 잡는 것은 그 사람의 전부를 잡는 것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그 사람의 존귀함과 명예를 상징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타국을 정복을 했을 때, 그 나라의 왕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고린도 전도서 11:7,15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11: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남자이고, 남자의 영광은 여자고, 여자의 영광은 자신의 머리입니다.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6:5에도 나실인은 서원하는 동안 머리를 잘라서는 안 됩니다. 만약 자르면 부정을 타고, 영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자들도 남자와 연애하다 헤어지면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모할 때도 삭발하는 것은 나의 모든 명예를 걸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불교에서는 출가하여 중이 되고자 하면 먼저 삭발을 합니다. 세속의 인연을 끊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고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겠다는 뜻입니다. 참새와 머리털의 의미는 강조이자 대비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가 우리의 부족과 연함을 상징한다면 머리털은 연약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1절에 이러한 의도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세 번째 원리로 넘어가 봅시다.
세 번째 원리는 하나님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강하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건강이나 안전을 더 뛰어넘어 영혼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참새도 지키는 분이라면 저들이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들을 우리의 코털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겉으로 볼 때는 우리는 참새와 같이 별 볼일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우리는 절대 건드리지 못하는 강한 존재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우리의 가정을 지키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지키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사업터를 지키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신평로교회를 지키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새가 떨어질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참새가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시절 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했고, 그다음에는 로마로부터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도 있었고, 부와 명예까지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목숨을 신앙 때문에 내놓아야 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초기의 교인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본문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으신다. 그러나 참새가 떨어질 때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존재는 육신의 생명을 멸하는 자들이 아니요 우리의 영혼까지 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시다. 그러니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는 감사를 환경에서 찾으려 합니다. 결혼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하다가 아이를 낳으면 감사합니다. 만년 과장으로 있던 남편이 은퇴해야 하는 데 아내의 40일 기도를 통해 부장으로 승진하게 될 때 감사합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놓았는데 대기번호가 100번째라 포기했는데 갑자기 합격되었다고 전화 올 때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그럴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감사는 당연히 감사할 일입니다. 이런 좋은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다면,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적으로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요셉은 수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야고보는 몸이 톱에 잘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로 복음을 전했던 토마스 목사님은 대동강에서 칼에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는 수많은 고문을 받다가 광복의 빛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믿음 때문에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은 수많은 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일을 당한다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감사해야 할까요?
아들 때문에!
1993년쯤에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 사는 한부부가 7살 어린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습니다. 북이탈리아인 밀라노에서 로마로 자동차 여행을 하는 중 괴한이 무차별적으로 쏜 총에 아들이 맞아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이 부부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장기를 떼어 6명의 이탈리아 어린아이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어린 아들을 먼 타국에 잃고, 아니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앞에서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나라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깊은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독생자 아들을 머나먼 ‘타국’에서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을 비열한 인간들에게 주었습니다. 참새가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하나님께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들의 심장을 가지고 제2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이냐?” 자신의 아들 때문이라도 아버지는 우리를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던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시는 이가 어찌 다른 것들을 아끼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잘못 계산한 겁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이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지 않겠습니까? 신평로교회를 다시 부흥케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을 단락을 나누어 주해하고 묵상한 글입니다. 각 단락에 대한 묵상으로 장별 순서에 따라 정리한 것입니다. 다른 부분의 주해와 묵상을 알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의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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