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강해 창조
창세기 1장
창세기 1장은 우주의 시작과 6일 동의안이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만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는 동시에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밝힙니다.
주해
1-2절 창조의 처음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태초에'(베뢰쉬트)은 처음을 뜻합니다. 태초에는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래전에'라는 뜻입니다. 마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원어를 분해하면 '베트'는 장소나 시간을 의미하고 '로쉬'는 머리, 장자, 1번을 뜻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 의미보다는 '오래전에'로 해석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천지는 '그 하늘들과 그 땅'으로 하늘은 복수형, 땅은 단수형입니다. 히브리즘에 하늘은 복수 형태로 존재합니다. 마치 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간다고 말한 것처럼. 땅을 '에레츠'인데 대지를 뜻은 '아다마'의 개념이 아닌 상속받을 기업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에레츠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2절)는 시작할 때의 지구의 태곳적 모습니다. 유의하여 보면 현대인들이 아는 '지구'는 창조 이야기가 없습니다. 첫째 날도 없고, 둘째 날은 공간이고, 셋째 날은 물속에서 땅을 불러냅니다. 지구는 1절의 '에레츠'입니다. 지구는 가장 처음 창조되었습니다. 엄밀하게 모세는 지구는 순서의 창조가 아니라 존재의 '전제'조건으로 받고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는 혼돈은 어지러운, 질서가 없는 상태이며, 공허는 텅 빈 상태입니다. 이 단어는 짝을 이루며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견하며 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 즉 말은 단순히 질서가 없고, 텅 빈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창조가 시작되지 않은, 불안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로, 텅 빔에서 충만으로 나아가는 구도입니다. 창조의 완성이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안식이라는 개념이 강한 것은 모든 것이 채워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 예레미야 4: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3-5절 빛이 있으라
-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오르)이 있으라'는 논란이 많습니다. 창조과학을 따르는 이들은 아직 광명체가 없지만 빛은 내는 오로가 있으며 이건 '사실'이다 라고 주장하지만, 모세는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있으라'의 시제는 미완료 형태로 기이한 표현입니다. 과거의 일어난 사건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형태입니다. 그러니 빛이 있으라는, 빛이 계속해서 있어야 한다는 소명과 직결됩니다. 바울은 이 빛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도 있습니다. 요한도 요한복음 1장에서 로고서는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 요한복음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헬라시대에 빛은 지식인 동시에 생명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동일하지는 않지만 빛을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뜻할 때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은 빛과 하나님의 얼굴이 거이 비슷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부르시고'
부르시고(카라)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명명) 하시면 그것이 이름이 됩니다. 이름은 곧 존재이며, 소명입니다. 빛을 '낮'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낮은 밤과 교차하는 개념입니다. 즉 홀로 빛나면서 계속 생뚱맞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밤과 교차하여 비추다가 사라지고, 다시 비추는 것을 반복하는 일상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빛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전제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부르시고'안에 담아냅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밤 역시 동일하게 불려집니다. 밤이 없으면 죽습니다. 종은 밤은 악하고 해로운 존재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밤을 없애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밤을 없애지 않고 밤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이렇게 첫째 날 창조가 끝이 납니다. 첫째 날은 넷째 날과 상응합니다. 빛의 창조는 넷째 날 광명체의 창조와 맺을 같이 합니다. 창조는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6-8절 둘째 날, 궁창을 만드시고
-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둘째 날은 궁창 즉 공간을 만듭니다. 궁창은 히브리어 '라키아(רָקִיעַ)로 그냥 텅 빈 공간을 말합니다.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곳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부만 소개합니다.
창 1:20, 시 19:1, 겔 1:22,23,25,26 단 12:3
공간은 '물과 물'이 갈라져 그 사이의 공간입니다. 이 표현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인간이 인식하는 공간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원래는 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언제든지 물속으로 공간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처럼. 그래서 예레미야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예레미야 5:22
둘째날 궁창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뉘라' 즉 분리에 있습니다. 사람의 창조 시에 한 사람이었지만 분리되어 남자와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원래는 하나였고, 다시 하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하늘(샤마임)'은 1절에서 언급된 동일한 단어입니다.
9-13절 셋째 날 육지를 불러내심
-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뭍이 드러나라
셋 째날은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뭍이 드러나라' 명하십니다. 역서 '뭍'은 땅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바샤(יַבָּשָׂה)로 마른 대지를 말합니다. 동일한 단어가 출애굽기 14장과 여호수아 4:22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땅이라고 말하지 않고 '마른땅'이라고 말합니다. 바닷속의 땅은 뻘이라 걷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의 바닥을 말리셨습니다.
- 출애굽기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야샤바르)이 된지라
- 여호수아 4:22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야샤바르)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 시편 66:6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야샤바르)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땅을 --- 내라 하시니
땅의 사명은 씨(제라 זֶרַע) 맺는 채소와 나무를 내는 것입니다. 후에 이것들은 사람들의 양식이 됩니다.(29-30절) '씨'라는 단어는 후손이란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승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제라)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4-19절 넷 째날의 광명체
-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넷 째날은 둘째 날 만든 공창(공간)을 채웁니다. 광명체를 채우고, 그것들로 땅을 비추게 합니다.(17절) 비추는 것을 그들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빛을 비추듯. 또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낮에도 비추고 밤에도 빛을 비춘다는 뜻입니다.
낮과 밤의 나뉨이 넷째 날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유의하여 봐야 합니다.(14절) 현대적 의미에서 이것을 자전이며, 공전입니다.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18절에서는 낮과 밤이 아닌 '빛과 어둠'이 다시 나뉩니다. 이렇게 본다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연대기적 순서가 아닌 상징과 신학적 의미에서 순서가 배열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20-23절 다섯째 날 물과 하늘을 채움
-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다섯째 날은 둘째 날과 상응합니다. 둘째 날은 물을 갈라 궁창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궁창을 새로 채우고, 아래의 물에 물고기로 채웁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22절)는 축복이 처음 등장합니다. 특이하게 하나님께서 생물들에게 '번성하라' 하지 않고 물들에게 궁창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히브리어의 독특한 표현법입니다.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습니다.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기독교가 진화론은 거부하는 구절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처음 기록되었을 때 진화론은 존재하지 않고, 보이는 실상을 평가한 것이기에 종류대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창조의 설계와 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종류대로는 '소명'에 관한 것이며, 창조물은 창조한 목적대로 살아가야 함을 말합니다. 존재의 고유한 속성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24-31절 여섯째 날 동물과 사람의 창조
-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여섯째 날은 동물과 사람의 창조입니다. 여섯째 날은 셋째 날에 대응합니다. 셋째 날은 물속에서 마른땅을 불러내십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거할 거처가 마련됩니다. 동물이나 사람은 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섯 째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심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창조됩니다. 여섯째 날은 다른 날에 비해 무척 길고 세밀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인 여섯째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강해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세상의 시작, 인류의 시작, 죄의 시작, 구원의 시작이 창세기에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항상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모세를 통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길을 걸으며 가나안을 향해 나갔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우리(이스라엘)가 누구이며, 왜 광야의 수고를 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위해 창세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10장까지로 창조와 타락, 그리고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까지 기록합니다. 후반부는 12~50장까지로 족장 시대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열두 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고,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열역학 제1 법칙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에너지는 줄지도 늘지도 않습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말하는 이 법칙은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무엇으로부터 피조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참된 신은 보이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자 ‘존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는 수많은 신이 있습니다. 개구리 신, 파리 신, 고양이신, 사자 신,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왕 파라오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출애굽은 애굽의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민수기 33: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예레미야 46: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셋째,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존재가 됩니다. 곧 말씀이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말씀이 곧 존재이고, 말씀이 곧 행동이며, 말씀이 곧 존재의 방식을 규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뉘사 하시면 나누어지고, 비치라 하시면 비칩니다.
넷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항상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좋았다’라는 히브리어는 ‘토브’인데 ‘적합한’ ‘완벽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7번 반복합니다.
다섯째, 사람의 창조를 가장 마지막에 존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용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되는 계명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는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 명하시고(28절), 땅의 음식을 먹을거리로 준다(29-30절)는 표현에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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