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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샤마임 202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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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기껏해야 루이스 벌코프의 조식 신학 책을 읽고 시험 친 것이 전부인 필자에게 칼 바르트와 판넨베르크는 이름 조자 버겁다. 어떤 이들은 최근의 보수주의 학자인 존 프레임 등을 언급하지만 그들과는 비할바가 아니다. 성향도 수준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필자도 존 프레임을 좋아하고 조직신학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는 항상 기본에 두는 학자이다. 그럼에도 그들과 비교할 바는 확실히 아니다. 특히 판넨베르크는 낯설고 어색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판넨베르크는 이름만 존재할 뿐 번역된 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년 5월 10일 ~ 1968년 12월 10일)

 

물론 찾고 찾으면 못 찾을리 없다. 가톨릭 계열의 분도출판사에서 <인간학>이란 제목으로 세 권이 1996년에 출간되었다. 2000년에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자연신학>이란 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들출판사에서는 <기독교 윤리의 기초>와 <사도신경 해설>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외에 몇 권이 더 있기는 하지만 2017년부터 2019년에 걸쳐 새물결출판사에서 세 권의 조직신학이 출간되었으니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판넨베르크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신학 정서상 판넨베르크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신정통주의를 표방한 칼 바르트에 대한 호의는 한국 신학 안에서 적극적 옹호와 적극적 반대의 입장으로 양분되어 있다. 몰트만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정말 모호하다. 전에 잠깐 언급한 것도 있지만 판넨베르크는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신학자이며, 굳이 연구할 의미가 찾지 못한다. 사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많은 부분에서 칼 바르트와는 너무나 다르고, 그렇다고 몰트만처럼 특이한 방향을 가진 것도 아니다. 판넨베르크의 저작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의외로 보수적이라는 것에 놀란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신학 성향은 독일이라는 관념 철학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는 것과 초월을 강조했던 칼 바르트로부터의 반동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Wolfhart Pannenberg, 1928년 10월 2일 ~ 2014년 9월 5일)

최근 비아출판사에서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서론>이 출간되면서 서평이 두 개의 서평의 올라왔다. 한 편은 광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고경태 목사이며, 다른 한 편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인 김진혁 교수이다. 두 사람의 서평은 하단에 링크했다.

 

내용은 차치하고 두 사람은 일단 조직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란 점이기에 집에서 책만 읽어대는 필자와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단의 평범한 목사로서 현대 독일 신학에 논하기는 역부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두 사람의 글을 읽으면 의외로 특이한 몇 가지가 발견된다.

 

먼저는 판넨베르크가 신정통주의를 표방했던 바르트로부터 벗어나려했다는 점에서는 둘 다 동의한다. 하자만 고경태는 판넨베르크가 바르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의 그림자에 있다고 생각하고, 최소한 그림자를 벗어났을지라도 그 그림자의 연장일 뿐일 것이다. 바르트가 제시한 신론 체계를 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경태

그 근거를 판넨베르크의 '신론'에서 찾았다. 필자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을 접한 적이 없기에 간과하기로 한다. 고경태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보편성까지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하나님 아들의 보편성'이다. 고경태는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유기'를 하나님의 아들됨의 표지로 보았던 반면 판넨베르크는 '아들의 보편성'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필자의 식견으론 아직 판넨베르크의 '아들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과학과 이성, 자연신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접점을 찾으러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다. 초월을 강조했던 바르트와 내재를 강조했던 판넨베르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긴장에 비교된다.

 

김진혁의 논지는 약간 다르다. 고경태가 말한 '보편성'을 김진혁은 '포괄성'으로 받는다. 

진리의 보편성은 조직신학자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제약에도 포괄적 지평 혹은 포괄적 해석을 추구하도록 계속 자극한다. 실제 <조직신학 서론>의 각 장을 읽어 보면 포괄성을 향한 조직신학의 이중적 추동력이 세부적 논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판넨베르크의 보편성과 포괄성은 세상과 '대화'하려한 의도가 분명한다. 김진혁은 세상에게도, 신앙인들에게도 모호하게 판넨베르크가 비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세속화한 사회를 배경으로 학문으로서 조직신학을 추구하다 보니, 세계 기독교 시대의 복잡한 신학적 도전이나 복잡한 정치적 맥락에 그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판넨베르크는 칼바르트의 제자가 맞다. 그렇지만 동시에 반동이기도 하다. 세상과 대화하려 했던 성향은 '화해의 신학'으로 정의될 수 있는 몰트만과 방향이 동일하다. 다만 몰트만이 기독론에 집중했다면 판넨베르크는 신론에 몰입한다는 점이 다르다.

 

칼 바르트와 판넨베르크의 차이를 '포괄성'으로 설명한다면,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의 차이는 '역사성'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르트든, 판넨베르크든, 몰트만이든 평범한 목사에는 버겁다. 이름만 들어도.

 

 

필자의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서론> 서평

 

조직신학 서론, 볼프하르트 판네베르크 / 박정수 옮김 / 비아

조직신학 서론 볼프하르트 판네베르크 / 박정수 옮김 / 비아 2차 문헌으로 접한 것 외에 판넨베르크의 글은 처음이다. 한 해 전에 새물결플러스에서 판네베르크의 <조직신학> 3권

392766.tistory.com

 

김진혁 교수의 서평

 

현대사회에서 조직신학을 한다는 것

[탐독의 시간]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서론>(비아)

www.newsnjoy.or.kr

고경태 목사의 서평

 

크리스찬북뉴스 - 서평- 조직신학 서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d Pannenberg, 1928-2014)는 유력한 신학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판넨베르크를 이해하려면 칼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www.cboo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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