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레위기 1:1 하나님께서 부르시니라
[설교] 레위기 1:1 하나님께서 부르시니라
레위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그가 불렀다. 모세를, 그가 말했다. 여호와가 그에게 회막에서’
레위기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회막에서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렀다는 말은 의미심장할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 ‘회막’이라는 장소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가 불렀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회막은 하나님이 명령에 의해 광야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하늘의 성소를 보여주신 다음 그대로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 출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성막은 하나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특별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만들 때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자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성막이란 표현은 거룩한 장막이란 뜻이지만 회막은 만남의 장막이란 뜻입니다. 레위기는 성막이라하지 않고 회막으로 표현함으로 만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회막이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만나는 방식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만남은 특별한 사람만, 특별한 방식으로만 만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생애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났고, 족장이라는 대표자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갈 등과 같은 사람에게도 나타났지만 족장들에게 나타난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막이 완성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에 가시적인 장소를 통해 만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하는 시간에 날짜에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바로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야곱 이후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나타나신 적이 없습니다. 야곱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인 요셉에게도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고, 요셉의 인생을 주도가 나가셨습니다. 그러나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거의 400년을 넘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하나님에 대한 들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었습니다. 정말 그 약속이 이루어질지 믿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때가차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때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불타는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소명을 주셨습니다. 불에 타지만 결코 타들어가지 않는 신비로운 떨기나무였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불같은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억압받는 백성, 억울한 백성, 울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거의 45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을 시기만큼 오래된 약속입니다. 그리스 신화같은 이야기 같고,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장구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꿈이 현실이 되어 우리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벤트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념을 뚫고 찾아오십니다. 낙담과 포기를 철회시키기 위해 지금 이 순간 택하신 백성들을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꿈꾸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이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순종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 앞에서 두려워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말씀으로 마른 땅을 불러내시는가 하면, 하늘을 열어 만나를 내리시고, 거대한 반석을 쪼개어 생수를 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늘 불가능한 현실을 넘어, 무한한 신비의 역사 안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절망선(line of despair)
프란시스 쉐퍼는 1890년과 1935년 사이에 거대한 하나의 선이 그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절망선이라고 불렀습니다. 합리주의에서 실존주의로 넘어가는 단계입니다.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최고라는 교만한 사상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옳다’ ‘저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기준과 합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틀리지 않아’라고 말함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대주의라고 말합니다. 또는 다른말로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종교 다원주의 등으로 풀기도 합니다. 올바른 기준이 사라져 버린 시대는 옳음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참 진리를 찾지 않게 됩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절망 선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헤겔’을 지목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한가지의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결론을 도출해 냈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학적 역사철학은 옳은 것은 시간이 흐르면 틀려질 수 있고, 틀린 것이 옳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옳음을 ‘정’이라고 하면 다름을 ‘반’이라고 합시다. 이 둘이 갈등하면서 결국 하나의 ‘합’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합’이 만들어진 순간 또 다른 ‘반’이 생겨나면서 역사는 끊임없이 옳고 그름이 반복하며 완전을 향해 나아간다는 역사 진화론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영향을 받은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을 비판함과 동시에 계승하면서 실존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이 주장했던 ‘합’의 자체를 거부하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진정한 합을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고 있어도 전달 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전달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탐구한다는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절대적 진리 자체를 추구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헤겔이 아직 하나님의 끈을 놓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 붙잡았다고 한다면 케에르케고르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케에르케고르의 뒤를 이었던 칼 야스퍼스, 샤르트르, 하이덱거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출구 없는 우주의 미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실존주의는 무엇보다 위기의 철학이다. 이는 인간 실존과 그리고 우주적 실존의 전체를 위기적 상황의 연속으로 해석했다. 위기 상황마다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해소를 위하여 개인의 모든 내적 자원을 요구한다. 각각의 위기는 동일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새로운 위기를 불러일으키며, 전체 계열은 궁극적인 "파선"에 도달한다. 실존주의는 환명과 절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철학적 비관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존주의는 궁극적 존재에 악을 귀속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 존재는 선과 악을 초월한다. 실존주의는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로 환원하는 허무의 철학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는 위기의 연속과 무와의 궁극적 대면으로부터 잘못된 위로를 도출한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실존주의 철학은 현재의 문화적 위기에 대한 근본적 대응이다.
실존주의의 시작은 진리에 대한 거부이며, 실존주의의 끝은 절망과 허무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출구는 없으므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자’라는 구호를 제창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인류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찾기를 포기했을 때 비극의 드라마는 시작되었습니다.
레위기의 시작은 이런 절망스런 인류를 찾아오시며, 그들을 부르심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죄에 갇혀 더 이상 살 소망이 사라진 애굽의 이스라엘, 스스로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입을 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빠져 나오지 못했던 ‘한계’ 속에서 주님은 갑자기 찾아오신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라는 이 단순한 말씀 속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을 버리고 혼자 광야로 나아간 길 잃은 어린양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어떤가?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렇게하고,’ ‘저렇게 되면’ ‘나도 저렇게 한다’ 라고 생각하며 온갖 수를 생각해 냅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 장의 카드를 가지고 돌려 막기하다 어느 순간 한도를 초과하여 더 이상을 돌려막기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아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수 저수를 생각하며 나름대로 멋진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갑자기 한계에 부딪혀 ‘인생의 부도’가 찾아옵니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됩니다. 출구 없는 인생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현욱아. 현욱아’ 라고 부르시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리 오너라. 내가 지금까지 널 기다렸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로 찾아 오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넘어지고, 사람과 관계가 깨어지고, 회사가 부도가 나서 도저히 일어설 힘이 없을 때, 우리는 우리의 문제의 제물을 가지고 주님께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주님께 엎드립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흠향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며 계명을 주십니다.
인생의 모든 답은 성막에 계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기를 원하고 친히 ‘만남의 장막’으로 불러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날 때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짐이 아니라 인생의 길이며, 어둠 속에서 등불입니다.
존 칼빈은 율법에대해 우리의 무력함을 드러내주는 것임과 동시에 삐뚤어진 우리의 본성을 교정하고 인도하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지시라고 표현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가 더해지며, 진정한 존재의 목적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Augustine Confession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나를 내신 자비로우신 주여, 비록 나는 당신을 잊었지만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나는 내 영혼 안에 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내가 주님을 부르기 전에 주님께서 온갖 소리로 나를 부르셨기에 나는 이제야 주님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김춘수의 꽃
누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비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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