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
2018.8.4
삶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가? 종종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우울해 진다. '삶'은 아름다움이나 '화려함' 등의 수사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존재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야하고,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고 말한다. 삶은 살아감이며, 살아감은 존재의 해석이다. 그것은 잠재태가 현실태로 치환되는 것이며, 또다른 잠재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삶은 존재의 방식이자 고통을 불가피하게 수반하기 마련이다. 삶이란 살아가야하는 의무와 특권의 긴장으로 인해 고통의 미소이며, 눈물의 아름다움이 되고야 만다.
이틀의 휴가, 아내는 둘 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했다. 조금만 걸어도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는 생각하며 집에 있자고 했지만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말했다.
"그래 가자"
그래 가자. 어디로 가야할까? 딱히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이다. 아픈 두 사람끼리 함께 할 수 있는 곳, 그곳이면 당일 휴가는 충분히 아름다우리라. 아내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고, 난 기꺼이 수긍했다. 남포동을 목표로 잡고 중간에 서면에 들르자고 했다.
서면, 서쪽의 밭이란 뜻이다. 부산 지도를 보면 서면은 서쪽이 아니라 중앙에 가깝다. 그런데 왜 서쪽 밭일까? 고대에 부산은 없었다. 부산이라 불린 곳은 현재의 부산진이었고, 동래가 고대의 부산과 같은 역할을 했다. 동래에 비해 서면은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밭들'이란 뜻의 서면이 된 것이다.
타임벨트가 끊긴 차는 수리비만 백만 원이 넘어갔다. 삼일 동안 정비소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다. 생각하면 속이 쓰리고 아프지만, 오늘은 아내와 처음 맞이하는 휴가가 아닌가. 모든 것을 잊고 단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부산 여행이다. 아내도 부산에 살았고, 나도 부산 토박이처럼 살았다. 그러나 양산에 온 후로 부산은 멀고 먼 타향이 되고 말았다. 이번 기회에 친정 같은 부산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실컷 놀자고 했다. 대신 아픈 아내의 발 때문에 걷는 것은 최소화하고.
집에서 양산역까지. 무더운 햇살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우리 둘의 길은 막지 못했다. 아내는 마냥행복해 한다. 나 또한 아픈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 그런지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다. 집에서 양산역까지 700m. 멀지 않은 거리지만 벌써 아내의 발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치잉 치잉"
도시철도가 출발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도시철도는 스멀스멀 양산을 빠져 나간다. 양산역은 도착할 때는 마지막역이지만 출발할 때는 첫역이다. 첫역은 당연히 긴 여행의 부담을 주지만 모든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는 특권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른쪽 칸 중간에 자리했다. 남양산역을 지나고, 부산대학역, 증산역을 지나니 부산의 첫역인 호포역에 도착한다. 한 시간을 넘게 달려 도시철도는 부산의 중앙인 서면에 도착했다.
첫 여행지는 백화점이다. 아침을 먹지 않은 탓에 약간의 허기를 느낀 우리는 롯데 백화점에 들어갔다. 돼지국밥이 전부인 나에게 아내는 나를 구부산상고 자리에 위치한 '호텔롯데 부산'으로 데리고 갔다. 촌놈은 긴장했다. 헐.. 백화점에 가서 뭘 드시려나? 혹시 십만 원짜리 뷔페? 브랜드는 고작 나이키나 아디다스나 아는 촌놈은 백화점은 무조건 다 비싼 것만 있는 줄 안다. 7천 원짜리 먹거리가 있다고는 상상할 머리가 없다. 그렇게 우린 허기진 배를 채우고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아내는 백화점은 나가기 전 자신이 좋아하는 백화점 1층을 아이쇼핑하자고 했다. 나의 가슴은 다시 두근반 세근반이다. 혹시나 물건을 사면 어떡하지? 옷 하나에 백만 원은 족히 된다는데? 한 여름에 모피를 파는 가게 앞은 지난다. 한 여름에 모피라? 무슨 심리일까? 백화점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나? 아내는 모피 한 벌에 천만 원은 넘는다며 겁을 준다. 남자라면 그 정도 가격에 절대 기죽지 말아야 하지만 나의 입술은 '내가 자주지. 아무렴 사주고 말지'라는 농담도 못하고 얼어 버렸다. 뭐든지 다 사주고 싶지만 사줄 능력이 없는 촌놈은 아내가 빨리 명품관을 벗어나 돼지국밥 풀풀 나는 서면중앙시장 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명품관을 나오며, 멋쩍은 듯 기념 사진. 백화점에 왔다고. 우리도 휴가 중이라고.
오랜만에 찾은 먹거리골목은 아직 한적하다. 아니면 폭염 때문에 지하상가에 숨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거리에 사람은 희소하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서점. 예전에 알라딘중고서점이던 곳을 예스24가 입점했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예스24중고 매장이라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섰다. 그런데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알라딘은 넓은 공간과 낮은 책장 덕분에 여유와 쉼이 어우러진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예스24는 교보문고를 축소해 놓은 듯한 다양하고 많은 책을 구비했지만 협소한 공간으로 인해 답답함을 주었다. 아직 미숙해 보이는 직원들의 태도와 표정은 우리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생각보다 오래있지 않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뿅뿅뿅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소리다. 그랬다. 그곳은 PC방이 아닌 오락실이었다. 나의 촉감은 틀리지 않았다. 갤러그 소리다. 어찌 갤러그를 하지 않고 그곳을 지난단 말인가? 아내와 나는 동전을 바꾸어 한 판에 무려 300원이나 하는 갤러그를 했다. 그런데 아내의 손놀림이 미심쩍다? 왠지 너무 날렵하고 프로에 가까운 동작이다. 예전에 놀아본 느낌? 정말 이었다. 아내는 오락실을 나와 왕년의 오락실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는 보통 학생이 아닌게 분명하다. 놀아본? 고딩이었다. 놀아본 과거의 사실을 숨기고 현모양처럼 살아가고 있는 아내의 본색?이 탄로난 것이다.
시간은 흘러 다시 저녁이다. '살처럼 빠른 시간'이란 속담처럼 화려한 휴가는 속절없이 흐른다. 아직 약간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아내와 함께 저녁 먹을 곳을 찾았다. 나고야에서 직접 전수 받았다는 어느 일본식 음식점에 들어갔다.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짜다. 탄탄멘이 원래 짠가 싶어 아내에게 물으니 일본음식이 대체로 짜다고 한다. 그렇구나. 맛은 나쁘지 않았다.
후르륵 후르륵
그렇게 이른 저녁을 때우고 다시 거리를 부유한다. 행복한 부유다. 즐거운 표류다. 목표도 없고, 목적지도 모른다. 그저 아픈 두 사람이 손을 잡았고, 거리를 함께 걸었다.
"알라딘에 가자"
아내는 예스24에 실망이 컷던지 기어코 알라딘 중고서점을 가고 싶어 했다.
"그래 가자"
난 다시 동의했고, 우린 기어코 알라딘 서점을 가고야 말았다. 이것이 우리가 즐기는 휴가다. 책을 보고 만지고 읽는 것. 책은 영혼의 위안이며, 삶의 격려자다. 아내와 나는 '책'으로 만나, '책'으로 살고, '책'으로 마지막까지 함께할 것이다. 예전 동보서적 건물 3층에 알라딘이 자리하고 있다. 예상대로 알라딘 넓직한 공간, 그리고 오직 '책'에 집중한다. 단순하면서 직관적인 디자인이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마케팅 관련 서적을 몇 권 샀고, 아내는 고양이와 소설책을 구입했다. 알라딘서점 아래층은 달콤카페가 자리하고 있는 데 독서하는데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른 곳에 비해 커피값이 조금 비싸지만 넓직한 공간과 여유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 공부하는 청년들이 주로 찾는다. 우리는 저물어가는 휴가를 부여잡기 위해 9시가 넘도록 그곳에 주구장천 앉아 책을 읽었다.
오늘 구입한 브라이언 트레시의 <판매의 심리학>에 이런 말이 있다.
"세일즈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기라는 사실이다. 무엇을 사고팔든 간에 세일즈맨과 고객이 서로에게 수지가 맞는 거래를 완성하는 것이 세일즈다"
무엇을 판다는 것은 상품을 속여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필요한(니즈)를 것을 알고 그것을 소개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관심, 관찰, 연구, 시도 등. 결국 세일즈도 사람에 대한 사랑이자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세일즈도 성경적 원리가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필요는 먼저 채우라는 것.
이렇게 화려한 휴가는 막이 내렸다. 교통비, 식대비, 그리고 커피값과 책 값을 합하니 무려 십만 원 가까이 소비했다. 아름다운 소비다. 이제 내일부터 초긴장 상태로 돌입하겠지. 커피숍도 멀리하고, 외식은 상상도 못하리라. 절박한 생존을 이겨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야 하니까.
아내가 오만 원을 보여주며 슬며시 이야기 한다. 둘째딸이 엄마 아빠 휴가 잘 보내라고 자신이 아껴둔 거금 오만 원을 보태주었다고. 이래서 딸이 좋은가 보다. 아들을 낳으면 수레를 타고, 딸을 낳으면 비행기를 탄다는 말이 어찌 근거 없는 말이겠는가. 딸을 둘이나 얻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있으랴. 이 또한 화려한 휴가의 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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