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7. 13:18-25 축복과 인사
37. 13:18-25 축복과 인사
1. 말씀 읽기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2. 묵상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수신자들에게 두 가지의 요청과 한 가지의 기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도에 대한 요청은 지금까지 히브리서의 특징과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요청입니다. 두 번째 주제로 나눈 ‘기원’은 바울서신이 갖는 독특한 마무리와 비슷합니다. 마지막은 형제들에게 문안하라는 권고로 마칩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문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문안은 서로를 돌아보는 공동체의 모범과 같습니다.
1) 기도에 대한 요청
‘우리’(18절)라는 단어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인들과 함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바울의 일행처럼 전도 여행을 위한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오해
기도를 부탁하는 일은 사소하거나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강자가 약자들에게는 베푸는 특혜도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기도를 받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돕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요청들
요청하는 기도의 제목들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ㄱ.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함
선(καλός)은 ‘아름다운’ ‘좋은’의 뜻을 갖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안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좋은 열매'(마 3:10), '선항 행실'(마 5:16) '좋은 땅'(마 13:8) 등의 의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흠없는 온전한 삶은 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위해 살아가야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하는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기도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흠 있는 성도의 삶을 온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행위이며, 고백입니다. 아무도 흠 없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기 때문에 열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선(καλός)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ㄴ. 너희에게 돌아가길 원한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독자들과 상관없는 별다른 존재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히브리서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들에게서 분리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고, 교리적으로 유혹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권면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18절의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 확신’한다는 표현은 편지를 쓰는 자신과 동료들을 변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어떤 연유로 히브리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없지만 공동체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작지 않습니다.
2) 마지막 기원
편지를 마치면서 수신자들에게 마지막 기원(祈願)를 하고 있습니다. 기원 속에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축복해야할 모범이 담겨 있습니다. 기원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또한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에 전제한 것입니다. 두 고백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ㄱ.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모범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가 되시며,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길 잃은 양들을 찾을 것이며, 게으르고 나태한 양들은 징계합니다.
예수님은 ‘큰 목자’로 부름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받은 사도들과 목회자들도 동일한 ‘목자’로 받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믿음과 신앙은 별개가 아닙니다. 동일하다 할 수 없지만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ㄴ. 영원한 언약의 피
‘피’는 생명이며, ‘언약의 피’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 언약 아래있던 믿음의 사람들과 ‘언약’(베리트)했습니다. 언약의 피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약속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옛 언약도 하나님의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그림자이고 모형이지만 가짜나 거짓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것들입니다.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옛 언약의 것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영원한 언약’이 되었습니다.
참 형상, 본체가 도래했기 때문에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모세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대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것이 왔음에도 임시적인 것을 붙잡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ㄷ. 죽은 자 가운데서 끌어내신 하나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살리다’는 표현이 아니니 ‘이끌어 내다’는 표현을 통해 출애굽을 연상하게 합니다. 살리심이 창조적 능력과 연결된다면 이끌어 내심은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자로서의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결국 ‘큰 목자’이신 예수님과 목자로서의 하나님은 이어감으로 삼위일체적 해석을 가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성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통해 성자 예수님의 구원이 온전해 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히브리서 안에서 ‘선한’(21절)은 구원을 의미합니다.(9:11, 10:1) 그러므로 21절의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구원사적이며, 섭리 가운데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즐거운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평강의 하나님’(20절)에 대한 고백은 고난 가운데 있는 수신자들에게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진정한 평안은 육신적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고백으로 오는 평안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나님께 ‘영광’이 세세토록(영원히)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3)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마지막은 ‘권면’과 ‘문안’에 대한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영적 공동체의 특징은 홀로 살아가지 않고 ‘함께’ 살아갑니다. 서로 권면하고 문안함으로 서로를 잡아줍니다.
ㄱ. 권면에 대하여
22절의 ‘권면의 말’은 지금까지의 모든 충고와 경고, 격려와 강권 등이 포함된 편지 전체를 말합니다. 권면(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έω)은 ‘~의’ 뜻인 ‘파라(παρά)’와 ‘부름’ 또는 ‘이름’의 뜻을 가진 ‘클레오(καλέω)’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권면을 종종 ‘make a call’란 구절로 해석합니다. 권면은 가르치고, 꾸짖고, 교훈하고, 달래서 바른 삶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권면이란 단어는 지금까지 히브리서 안에 담긴 모든 위로와 책망, 경고와 격려를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권면에 대해 자신을 용납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비록 히브리서 기자가 자신의 권면의 말들을 용납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힘써 권면의 말들을 지키라는 의도인 것을 압니다. 또한 권면의 말들을 서로에게 하여 아무도 믿음에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히브리서는 시공 속에 제한된 특정한 기독교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ㄴ. 문안에 대하여
디모데에 대한 언급은 히브리서의 기자 누구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바울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누군가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이거나 바나바일 수 있으며, 혹자처럼 실라일 수 있습니다. 그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심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을 방문하기를 원하며, 눈을 직접 그들의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문안(問安)은 문자 그대로 상대의 상황을 묻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자녀들에게 항상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의 방에 들어가 안부를 묻도록 했습니다. 교회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교회가 갖는 독특한 정체성이자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랑은 관심이며, 안전을 기원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를 살피지 않은 것은 이기적인 것이며, 가난 속에서 고통받는 지체를 방치하는 것은 악입니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닙니다. 삶이며, 행동하는 것이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기독교는 죽은 시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24절)는 기독교의 문안이 한 지역에 한 정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교회는 전 지구적이며, 온 우주적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성도와 알랙스카에 있는 성도들은 주 안에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됨으로서 서로 문안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공동체 안에서 서로 문안해야 합니다. 또한 멀리 있는 고난받는 지체들에게도 문안해야 합니다. 그들을 찾아가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마지막 말은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을 따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은혜(카리스)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며, 우리에게 대속의 죽음으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2:9) 그로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4:16)로 나아가며, 그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12:15)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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