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5. 2:10-18 우리의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5. 2:10-18 우리의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1. 말씀 읽기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2. 묵상
기독교는 이성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을 이성과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중세의 스콜라 철학처럼 이성으로만 접근하게 된다면 결국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한계가 있어서 동일한 단어라도 시대와 상황,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고 용납될 수 없는 신성모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이단들이었던 에비온파는 예수님을 사람으로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단정했습니다. 또 다른 이단이었던 영지주의는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은 진짜 사람이 아닌 형상에 불과하다는 가현설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신비요 기적의 종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하여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기비하’입니다. 절대타자이시며 지존자이신 하나님이 아이로 태어나시고, 사람의 보호를 받으시며, 율법의 제정자이신 분이 율법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없는 의인의 죽음이며, 죄의 실체를 보여주는 악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9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죄 없는 사람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죽을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대속의 죽음이며, 자신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로 소개합니다.(10절) 구원은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고, 많은 이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고난을 통과하시고, 자신을 내어 줌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10절)입니다. 모든 만물이 경배할 대상이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그분이 친히 고난을 당하십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그리스도
십자가로 인해 믿음의 사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민족과 상관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입니다. 에베소서는 끊임없이 복음 안에서 ‘통일’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라고 말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믿고 죄씻음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한 근원, 즉 하나님께 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히 ‘친구’라 불렀습니다.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요 15:14-15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1절과 12절을 봅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하게 ‘형제’가 되었다고 선언하며 이미 구약에서 에언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이 구절은 다윗의 시인 시편 22:22을 인용한 본문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형제와 회중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우리와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 ‘형제’ 또는 ‘친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친구 되심이 무엇을 말합니다. 요한사도는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더한 사랑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곧장 대속의 사역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같은 사람으로서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일을 멸하십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절)
마귀가 누구입니까? 그는 간교한 자요 자신만을 위하는 자요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일으켜 살인하게 만드는 자입니다. 요한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고 말합니다. 또한 가인과 같이 살인하는 자들은 ‘악한 자’에게 속했다고 말합니다.
요일 3:10,12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그리스도
마귀를 멸하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합니다. 과연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죄 없는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누구입니까? 같은 사람으로서 형제들의 죄를 사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었으나 죄가 없으시며, 다른 제물이 아닌 친히 제물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비하시고, 신실한 제사장입니다. ‘자비롭다’(ἐλεήμων)는 많은 긍휼이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마태복음 5:7에 사용되었고, 동족어인 ‘ἐλεέω’가 마태복음 5:7과 마태복음 9:27에서 사용되었습니다. ‘ἐλεέω’가 주님이나 하나님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면 ‘ἐλεήμων’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마 5:7 긍휼(ἐλεήμων)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ἐλεέω)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ἐλεέω)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님은 우리를 보실 때 한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ἐλεήμων)히 여기십니다. 고난과 죽음을 맛보심으로 인간들을 ‘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적 삶은 이성적 사유가 아닌 경험된 삶으로서의 앎인 ‘아다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슬픔,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능히 도울 수 있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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