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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인물

샤마임 2018.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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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인물

교회사에서 중요한 중세 인물을 소개합니다. 필자가 개신교이기 때문에 가톨릭의 관점이 아닌 개신교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자료를 취합합니다. 이해 바랍니다.


중세는 그레고리가 교황이 되던 590년 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까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는 단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기는 나누는 문제는 여러 측면이 있지만 편리하기 때문에 나누는 것에 합의 합의합니다. 저는 그레고리 교화부터 루터가 95개조를 붙인 때까지를 중세로 정하고 중세 인물을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그레고리 교황 590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년 - 1153년 8월 21일)

12세기에 활동한 수도자로 시토회를 창립하였으며 제2차 십자군 원정 중에 설교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성인. 축일은 8월 20일. 베르나르는 독일어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곰처럼 힘센’, ‘힘센 곰’을 뜻한다. 회화에서는 주로 시토회의 하얀 수사복에 수도원장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발 밑에 주교관과 성체, 사슬로 묶은 악마, 하얀 개, 책, 벌통과 함께 그려진다. 양봉가·양초제작자·모래채취장·일꾼의 수호 성인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1033/1034년 ~ 1109년)

캔터베리의 안셀름(이탈리아어:Anselmo d'Aosta, 라틴어: Anselmus Cantuariensis, Anselm of Canterbury, 1033/1034년 ~ 1109년 4월 21일) 혹은 안셀모는 이탈리아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1093년~1109년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냈다.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로서, 신 존재를 대상으로 한 존재론적 신의 존재 논증와 십자군에 공개로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셀무스는 1494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4월 21일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일부 개신교(성공회, 루터교)에서 이 날을 기념한다. 1720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안셀모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성 보나벤투라(1218년? - 1274년)

보나벤투라(Sanctus Bonaventura; 1218년? - 1274년 7월 15일)는 로마 가톨릭의 중세 시대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인으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경건하고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알려진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흔히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거나, 추기경을 상징하는 빨간예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지며, 망토 가장자리에는 세라핌이 장식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의 성인으로서 축일은 7월 15일이다. 상징물은 책·십자고상·성체현시대이며, 신학자·농부·짐꾼·직조공의 수호 성인이다.


요하네스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 1260년경-1327년경)

요하네스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 1260년경-1327년경)는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신비사상가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마이스터 엑카르트라고 통칭된다.

관련 기사, 당당뉴스 왜 에크하르트인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년~1308년)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복자이며 '영민한 박사'(Doctor Subtilis)라고 불렸다. 주요작품으로 'Opus oxoniense'와 'Opus parisiense' 2부로 구성된 명제집 주석서가 있다. 기독교인으로 프란체스코회(작은형제회)에 입회하고 옥스퍼드에서 배웠으며, 학업을 마친 다음에는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고, 1305년부터는 파리에서 가르쳤으며, 1308년 쾰른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새로운 자연 연구의 영향과 프란체스코회의 신학적 노선 아래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반대하고 중세철학을 점차 르네상스로 인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위키백과에서 가져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년? ~ 1274년 3월 7일)는 기독교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천사장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요한 타울러(Johannes Tauler (1294?-1361)

“빛나는 박사”



윌리엄 오캄 또는 오칼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Occam, 1280년 - 1349년)

윌리엄 오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William of Ockham.png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Occam, 1280년 - 1349년)은 영국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이자 철학자이다. 영국 서리 주의 오컴 출신이다. 윌리엄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로 지극히 청빈한 삶을 살았다. 유명론의 선구자로서 그는 일반적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인정 받고 있다. 방법론적 원리인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오컴은 신앙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다 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하였고 종교개혁기에 루터가 좋아했던 유일한 스콜라 철학자였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는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여겨지기도 하며 위클리프의 교설은 롤라드 즉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순교자 윌리암 틴데일에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화체설을 반대하고(transubstantiation),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다.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위키백과)


얀 후스(Jan Hus, 1372년-1415)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재에는 18세기 이후에 설립된 모라비아 교회 혹은 체코 개신교라는 명칭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Jan hus 1.jpg



토마스 아 켐피스(1380년 ~ 1471년)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독일의 신비사상가이다. 라인 강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즈볼러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정결·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寫本) 및 인쇄·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 중 <준주성범>,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는 책이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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