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설교, 마리아의 헌신
마리아의 헌신
마가복음 14:1-9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예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제목이나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어서 그녀는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준비해 줍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줍니다. 남자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먼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가장 위한 것을 예수님께 온전히 드렸던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이며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남매(男妹) 간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 자주 들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렇게까지 극진히 주님께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마리아는 자신의 전재산과 같은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렸을까요? 도대체 왜? 우리는 마리아의 과도한 헌신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됩니다. 다행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임을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아직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은 했습니다.
14장 1-2절을 읽어보면 분위가 상당히 안 좋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올 것을 알고 있었고, 그때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당연히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예수님도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음산한 분위기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 마을에 가득 차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 가볍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는 절대 건강한 사람과 함께 식사할 수 없으며,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오면 20m 전방에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 거주민이 아닌 자신들만의 거처를 따로 마련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집 또는 장소라는 벧과 가난한 비참한 의미의 ‘아니’가 합해진 단어로 비참한 자들의 마을, 가난한 자들의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베다니는 나병환자로 의심받은 사람들이 대제사장에게 정결 판결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베다니에 살았던 사람들은 유대인이지만 일반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호한 신분은 그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그 어디에도 낄 수 없는 끼인 존재가 되어 비참함이 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실때 갑자기 마리가 들어옵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순전한 나드 향입니다. 나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없는 것입니다. 나드는 히말라야 산 고도 3000-5000m 정도의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즉 인도 북부 산맥인 것이죠. 인도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나드는 '향기를 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드향은 나드 뿌리에서 채취합니다. 휘발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공기중에 노출되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나드향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공기와 철저히 차단된 봉인된 돌그릇을 사용했습니다. 나드향도 어마어마하게 비쌌지만 돌그릇도 고가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3에서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를 팔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길을 위해 고가의 자동차를 사준 것보다 더 큰 것을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까지 자신은 거의 써보지 않은, 언제 쓸지는 모르지만 아니면 어려울 때 돈을 구하기 위해 고가에 팔 수도 있는 그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머리에 붇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나병촌에는 살이 썩는 냄새가 은근히 진동하며 배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세상에서 아무나 맡을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시몬의 집에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고라고 말합니다.(8절) 그렇다면 마리아가 정말 예수님의 죽음을 알았을까요? 몰랐을 겁니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여인의 행동이나 다른 제자들의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8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즉 우리는 뭘 잘 모르고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뜻하지 않게 귀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은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향해 한발자국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제자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시시각각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도 맡지 못했을 터이지만 예수님의 코는 지옥에서 올라오는 시체 썩는 악취를 느끼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부당하고 인정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와 악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하시며,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운명적인 삶의 경로를 따라 죽음까지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하고 악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스스로 연약하고 비천한 자의 모습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역설적 신비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우리에게 그 장소로 들어가서 향기를 맡아 보라고 권면합니다. 요한복음 12:3을 보면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고, 나병환자들의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 갑자기 향기가 온 집에 가득합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그 향기는 빠르게 사라져 갔고, 곧 다시는 맡지 못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찌보면 허망한 행위 또는 과도한 사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한 사람이 화를 냅니다. ‘왜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는냐 차라리 그것을 삼백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지 맞지 않느냐?’라고 묻습니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어찌보면 굉장히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그는 정확하게 향유의 가격을 알고 있었고, 철저히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가룟 유다였으며, 그는 예수님의 돈을 관리하면서 자신을 위해 그 돈을 훔쳐간 도둑이었습니다. 합리성과 신앙이란 이름 뒤에 숨겨진 은밀한 악, 그것이 가룟 유다의 정체였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에게서 썩는 냄새가 진동함을 느꼈습니다. 가룟 유다의 말은 말 자체가 아니라 그의 심중,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악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설명하십니다.(7절) 이 말은 가난한 사람을 돕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계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상황은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님께 헌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결정적 운명의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을 바꿀 그것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위대함은 바로 예수님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3년을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전혀 이해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어떤 여인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주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다해 예수님께서 죽지 않도록 지켜 주겠다고 큰소리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열심이며, 게으른 신앙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막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무엇을 하시려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을 신뢰했고, 자신이 헌신해야할 때, 할 곳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더 읽을 거리]
'구약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0) | 2021.04.06 |
---|---|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설교 토요일 (0) | 2021.04.02 |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설교 수요일 침묵과 열심 (0) | 2021.03.30 |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설교 화요일 포도원 비유 (0) | 2021.03.29 |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설교 (0) | 2021.03.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