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산다는 것 / 크리스틴 폴 / 죠이선교회
공동체로 산다는 것
크리스틴 폴 / 죠이선교회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무난(無難)히 끝난 것처럼 보이던 공동의회는 순식간에 뒤집어지고 그동안 사이좋게 지냈던 성도들이 서로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고, 언성을 높이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으르렁거리며 멱살까지 잡으며 예배시간을 아수라장(阿修羅)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몇몇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서부터 시작되었고, 곧 어떤 이들은 그 결정에 대해 잘못된 반응은 보였고, 또 다른 결정과 다른 반응이 이어졌으며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했다.”(7쪽) 핵융합반응처럼 순식간에 교회는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반대하던 일단의 교인들은 자기들만의 교회를 새로 개척하여 나갔다. 나간 교인들은 그동안 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교회에 헌신했던 분들이었다.
수십년을 얼굴을 맞대며 사이좋게 지내던 분들이 한 순간에 돌변하는 것을 눈으로 체험한 후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한동안 목회적 회의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잠잠해졌을 때 들려오는 소리가 ‘우리도 그랬어’ ‘H교회는 지금도 싸우고 있어.’ ‘서울의 X교회는 교회가 아예 사라졌다는데’였다. 한 두 교회가 아니었다. 수많은 한국교회가 분쟁과 다툼으로 멍들고 신음하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던 S교회도, J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란 무엇인가?
크리스틴 폴의 <공동체로 산다는 것>은 위대한 책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의는 교리적 진술에 편중한 나머지 실존적 질문을 함구(緘口)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피상적 진술만으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좀더 실제적인 대안과 혜안(慧眼)은 없을까?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제목은 ‘Living Into Community’ 원제를 그대로 번역한 듯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Living 즉 삶은 뭘까? 머리말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네 가지 실천’을 이야기 한다. 감사, 약속, 진실, 손대접의 네 가지 실천을 통해 공동체가 썩 괜찮게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 공동체는 감사로 시작하고 약속과 진실함으로 유지되며 손대접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는 결코 단선적이거나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로 나타나는데 그 사실은 손대접의 실천을 끌어내고 강화시킨다. 우리의 약속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충실하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우리의 진실함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로 말미암은 것이다.”(25쪽)
그래도 감사할 수 있을까? 교회는 풍비박산 되고, 개인적인 상황은 절망적 상태가 되었다. 감사할 제목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분노와 실망이 마음을 짓눌렀고,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때도 감사할 수 있을까? 신앙마저 내팽개치고 싶었다.
“값비싼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실제로 이해할 때 우리가 드릴 것은 오직 감사뿐이다.”(29쪽)
굉장히 불쾌했다. 교과서식 틀에 박힌 문장은 책을 읽는 흥미까지 떨어뜨렸다. ‘존재 자체가 선물’(30쪽)이라는 말도, 감사가 ‘거룩하고 선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란 말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가서 감사의 결핍은 ‘매우 위험’(31쪽)하다고 말한다. 감사하라는 말은 결국 부당한 현실에 만족하고 ‘가만있으라’는 말로 들렸다. 용납하기 힘들었다. 교회를 어지럽히고, 다른 교인들을 선동하여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고, 자기편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모욕하는 상황을 보면서 감사할 수는 없지 않는가. 바리새인처럼 ‘나는 저들과 같지 않아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의 생각을 정당하다고 본다. 적어도 다음 문장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감사의 결핍으로 인한 피해자 일뿐 아니라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종종 감사를 무시하고 불평을 선택했다.”(34쪽)
감사하지 못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나는 피해자다’는 피해망상(被害妄想)에 사로잡혀있다. 나는 피해자이기에 나를 괴롭히고, 부당하게 대하는 이들 때문에 불평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불평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본회퍼의 말처럼 불평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준과 풍성함을 따라 공동체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방해’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감사의 결핍은 악을 대항하는 또 다른 악이다.
감사는 무위(無爲)적 상황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깊은 영성의 결과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일어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서했다. 은혜로운 공동체는 ‘풍만한 용서가 있’(36쪽)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나를 괴롭히는 타인을 용서할 때 감사할 수 있다. 비판은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인내하지 않아서이며, 사랑하지 않아서이다. 감사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처럼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로서 온 그 무엇도 하찮을 수 없’(36쪽)음을 아는 것이다.
“감사란, 견딜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있을 때도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분이시며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42쪽)
결국 감사는 상황이라는 수평적 차원이 아닌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이다. 그것은 상황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것이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며,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고 가는 것이다. 절망적 상황은 희망을 보여주는 기회였고, 적대적 관계는 화평의 노래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불평하고 원망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치를 떨며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분노했을 뿐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못했다.
교인들을 품지 못한 것이 아쉽다. 십자가의 용서를 더 설교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난 그 때 더 많이 감사했어야 했다. 상황이 암담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감사는 암울한 상황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만약 그 시간을 다시 돌아간다면, 감사하고 싶다. 아니 지금 여기서 감사해야겠다. 감사는 이루어짐의 결과가 아니다. 삶(Living)은 '선물'(36쪽)이기에 존재 그 자체가 감사이다. 불평하고 싶고, 뜻대로 움여지지 않을아 답답할 때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을 감사해야겠다.
“주님 오늘 아침 나를 제정신으로 깨우셨습니다. 그러실 필요가 없었지만 그렇게 하셨습니다.”(43쪽)
책은 아직 시작인데 난 아직도 첫 장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장을 덮고 첫 장을 펴고 다시 줄을 긋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역자 : 크리스틴 폴/권영주,박지은 | 출판사 : 죠이선교회출판부 판매가 : 15,000원 → 13,500원 (10.0%, 1,500↓) “인간은 공동체 안에 있도록 지음받았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가장 풍요로워지고 가장 인간다워진다.”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많은 경험을 한다. 그리고 공동체가 우리를 성장시키고 온전하게 해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설렌다. 그러나 곧, 공동체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부대끼다가 실망하고 숨어버리고픈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공동체는 다르리라는 환상을 놓지 못한다. 우리는 왜 공동체를 포기하지 못하는가?“우리는 생명력과 신실함과 돌봄이 있는 공동체를 꿈꾸기 때문에 계속 교회를 세우고 회복해 나간다.”진정한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진정한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가? 탁월한 리더십, 탄탄한 시…[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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