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박영식 /새물결플러스
“고난은 항상 질문을 야기한다.” 고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질문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닥칠 때 누구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되돌아본다. 고난을 하나님의 매로 생각한다. 십여 년 전 인생의 밑바닥을 치고 있고 있을 때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였다. ‘고통에도 뜻이 있다’는 고(故)옥한흠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를 읽었지만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고통에 뜻이 있다면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뜻이 없단 말인가? 자조적 비아냥거림이 절로 나왔다. 고통 자체보다는 ‘왜 고통 당해야하는가’에 대한 고통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아직도 당시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으로 신앙의 회의감이 삶의 기저에 침전되었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서 “성경의 수많은 기적이 왜 나에게 일어나지 않습니까?”물었고, “당신은 정말 살아계십니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았고, 삶은 근근이 이어졌다.
그날, 고통의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는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질문한다. 고통과 악에 대한 전통적 답변은 ‘예정’과 ‘섭리’로 구분된다. 예정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속한다면 섭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속한다. 예정과 섭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수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 답이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옳은 것일까? 작년 4월 16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들은 진도 앞바다에서 타고 가던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수장되고 말았다. 사망 295명 실종 9명 합 304명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까닭 없이 죽어간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대입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모교회 장로이며 국무총리 후보였던 ㅁ후보자의 강연이 알려지면서 한국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극단적 논쟁이 일어났다. 강연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너희들은 이조 5백년 허송세월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남북분단을 만들게 주셨어. 저는 지금 와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주4.3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며 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제주도 4.3 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제주도) 반란을 일으켰어요."
요약해 보면 하나님께서 고통을 준 이유는 한국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공산주의가 남한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ㅁ씨에 의하면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위해 어떤 ‘악’이라도 저지르는 분이된다. 저자는 이러한 그릇된 하나님의 뜻을 비평적으로 바라본다. “신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사건을 일부러 의도했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그저 인류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신이 사용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37쪽)고 주장하면서,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모든 고통이 다 하나님의 징벌’은 아니라고 말한다.(45쪽)
“거듭 말하지만 어린아이의 죽음과 같은, 도무지 보상될 수 없고 회복할 수도 없는 고통을 두고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일은 하나님을 무정하고 잔인한 존재로 만드는 악한 처사다.”(58쪽)
그런데 기존의 교회는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그렇게 쉽게 운운할까? 저자는 4장에서 ‘전통적인 대답들은 여전히 정당한가?’를 묻는다. 우리는 대개 ‘지금은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이해하게 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이라고 말한다.(61쪽) 탁월한 사변가요 철학자였던 라이프니츠는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1710년 ‘신정론’을 출간한다.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은 ‘하나님의 선함에 대한 변호’이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하나님께 원인이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만드세 세계는 완벽한 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에 일어난 대지진과 해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선하지 않으며, 심지어 완전하지도 않음이 만천하에 폭로된다. 라이프니츠의 하나님의 변호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정한 존재로 만들었고, ‘비인격적이고 냉정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68쪽)
전통적인 신정론은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73쪽) 저자는 이러한 오해가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아 악은 선의 결핍으로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때문으로 돌린다. 하나님은 알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고 설정함으로 예지와 예정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전통적 신정론의 한계는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식의 환원주의적 성향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모든 고통에 뜻을 명확하게 풀어주지 않으며, 모호한 채로 남겨 두기도 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 예로 욥의 고난을 언급한다. 욥의 고난은 ‘전통적인 신정론의 틀 속에서 오해’(86쪽)있다고 보고, 욥의 고난을 정직하게 대면하자고 촉구한다.
욥의 결말은 축복이다. 그러나 인과율은 아니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창조물의 장엄함과 신비에 대하며 묻는다. 욥은 ‘알지 못한다’고 일관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질문할 뿐 답을 주지 않는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산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와 근거에 대해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명쾌한 답을 주시지 않는다면, 이제 ‘신비로의 환원’만이 남을 뿐이다.”(90쪽)
그렇다.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신비’다. 신비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변호할 수 없다. 또한 ‘고통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깊은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게 한다.(98쪽) 그럼 하나님은 ‘그날 어디에 계셨을까?’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절규’하신다.(184쪽) 하나님의 전능은 파괴적 힘이 아닌 ‘오직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155쪽) 저자는 전통적 기독교가 하나님의 강함에 신론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보고, 오히려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이 드러나야 할 것을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은 철저하게 무능함 속에서 죽어간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현대신학의 변용은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에 초점을 맞춰 그리스도의 약함 안에서 하나님의 약함을 말한다. 기독론적 접근은 창조신학에서 이해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158쪽)
고통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하지 않았던가. 속담에도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다. 섣불리 고통에 답을 주지 말고 고통당하는 이들 곁에 머물라. 그저 같은 마음으로. 이것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빌 2:5) 예수의 모습이고,(171쪽) 예수를 통해 세상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고통 당하는 그들과 함께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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