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
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1. 들어가면서
안셀무스의 세 번째 책이자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속죄론을 다룬 <인간이 되신 하느님>입니다.(이후 ‘하느님’은 ‘하나님’)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에서 오직 이성으로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했습니다. <프로슬로기온>에서는 경건한 기도 형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프로슬로기온>의 서문이자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존재하시며, 그는 최고선, 곧 그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만물은 자신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그리고 선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를 필요로 하는 최고선이며, 우리가 신적 본질에 관해서 믿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바로 그것이다.”
이제 마지막 책에 해당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서는 성육의 비밀을 파헤칩니다. 그러나 현대의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약간 모순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대속의 의미를 집요하게 파헤침으로 성육신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안셀무스는 본서를 통해 세 가지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합니다.
ㄱ. 하나님은 예수님 없이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만으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는가?
ㄴ. 하나님은 죄의 대가에 대한 충족 없이 용서할 수는 없는가?
ㄷ. 꼭 신-인인 중보자야 이어야만 하는가?
2. 구조와 요약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권에서는 이 책의 주제인 대속론을 다룹니다. 2권은 대속의 제물로서의 신-인의 교리를 다릅니다.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을 여전히 견지하지만, 이전의 책보다는 보다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성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대화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어렵습니다. 대부분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중요한 부분만 그대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1권]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본성의 천함과 연약함을 입으시고 사람의 본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셨는지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인의 자궁 속에서 잉태되어 ‘피곤함과 굶주림, 목마름, 폭행, 그리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는 소리는 하나님을 모욕하며 상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비난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왔다면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생명이 들어오는 것은 합당합니다.
인류의 구속은 오직 하나님으로 가능합니다. 죄 있는 사람은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악마에게 넘겼습니다. 도둑이 다른 도둑을 맞이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악마는 인간에 대해 어떤 권리도 갖지 않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자를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오직 아들만이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서만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할 수 없었을까요?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되어야만 합니다. .. 이것이 바로 천사와 인간이 하나님께 지고 있는 빚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옳고 곧은 마음, 즉 의지를 갖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의지의 정의 또는 의지의 올곧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것은 탈취이며 영광을 가리는 것이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것을 다시 보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죄인이 하나님께 마땅히 행해야 할 만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벌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들을 통해 보상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보상을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타락한 천사는 대속할 수 없습니다.
인간도 대속(보상)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고행과 선행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 없다 해도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크기가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죄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인간은 악마의 유혹에 스스로 넘어가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의 무능함으로 핑계 삼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죄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2권]
인간은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고, 결국 죽어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이성적인 존재가 완전히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어떻게 죽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릴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담이 혈통과 한 처녀의 여인으로부터 인간을 취하셔야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과 사람이 한 인격 안에서 연합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채무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나누지만 불행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시지만 무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하나님께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대속으로 인간들이 하나님께 만족을 주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간들의 의로 덧입혀 줍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지 악마에게 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악마와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알려 줍니다.
3. 나가면서
우리는 그동안 안셀무스의 세 권의 책을 함께 살폈습니다. 후기의 저작으로 넘어갈수록 철학적 사유 방식을 버리고 성경적 관점을 취하게 됩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성육신의 의미와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앞에서 질문에서 세 가지 질문으로 되돌아가면 이 책의 논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ㄱ. 하나님은 예수님 없이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만으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는가?
ㄴ. 하나님은 죄의 대가에 대한 충족 없이 용서할 수는 없는가?
ㄷ. 꼭 신-인인 중보자야 이어야만 하는가?
성육신 사건은 가장 난해한 주제이면서 성경의 핵심입니다. 안셀무스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책을 읽어 나가는 저는 ‘사랑’이란 단어가 입가에 맴돌았습니다. 성육신은 공의의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모순’입니다. 안셀무스는 ‘필연’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필연은 기독교적 믿음이 전제된 관점에서만 가능한 추론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난해한 신학적 주제를 철학적 사유 방식을 통해 증명해 내려 했던 안셀무스의 독특함은 위대하기까지 합니다. 성육신은 묵상하면 할수록 더 깊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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