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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우신예찬 Moriae encomium

샤마임 2019.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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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우신예찬 Moriae encomium

 

*이 글은 [국민일보 미션라이프][마이트웰브]에 기고된 글입니다.

 

1. 우신예찬은 어떤 책인가?

 

<우신예찬>은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에라스뮈스를 단박에 유명인으로 만들어 준책입니다. 에라스뮈스가 영국의 토머스 무어의 시골 별장에 머물며 지은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에라스뮈스는 전 유럽에 유명세를 떨치게 했지만,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현자들에 대한 우신(Stultitia)의 풍자는 중세 교회를 향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들은 에라스뮈스의 탄생과 살아 나온 배경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에라스뮈스는 인문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제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궁핍한 삶으로 인해 기꺼이 권력자들을 칭송하는 글을 쓰며 아부했지만, 수긍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신예찬>을 해학과 풍자로만 이해한다면 역설적이며 아이러니로 가득 찬 문학으로 칭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흐름과 저변에 흐르는 주제는 중세 교회와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입니다.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풍자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전개합니다. 그것이 그의 탁월한 문학적인 기법인 것은 확실하지만, 용감하지 못한 성품과도 적지 않게 닮아 있습니다. 중세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 때 가담하지 않고 자신이 비판했던 중세 교회에 남아 있던 것과 흡사합니다. 에라스뮈스의 관용적인 성품과 인문주의자적 성향은 그의 작품 세계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겁하다’ 거나 ‘나쁘다’라고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에 불어 닥친 전쟁과 수많은 고통은 에라스뮈스의 관용을 배우지 못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제 책의 내용은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참고한 책은 라틴어에서 직역한 김남우의 번역본을 사용했습니다.

 

2. 간략한 요약

 

[책은 토머스 모어에게 보내는 인사가 서두에 자리하고 있고, 뒤이어 우신예찬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부록으로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지만, 편지는 제외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요약하며, 직접 인용과 간접 인용은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구절인 경우는 ‘ ’과 “ ”로 구분했습니다.]

 

토머스 모어에게 보내는 인사말

 

로테르담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토머스 모어에게 인사합니다. 영국으로 향하는 여행 중에 잡담으로 허송세월 하지 않으려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내 생애에 가장 달콤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을 떠올리면서 우신예찬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지만 모어(More)라는 당신의 이름은 우신(Moria)을 뜻하는 희랍어와 가깝습니다.

 

제가 이글을 쓴 것에 대해 학자가 쓰기에 너무 가벼운 것이라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가벼움과 장난스러움은 위대한 작가들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 도처에서 온갖 장난에 빠져 살면서도 오로지 학문 세계에서만은 전혀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일은 불공정한 일입니다. 상당수의 종교인들이 앞뒤가 전도되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각한 비방은 쉽게 참아 넘기면서 교황이나 군주에 대한 가벼운 농담에는 발끈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 있지 않고 즐거움을 주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신에게 욕먹는 일을 즐겁게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신이 말하다

 

나야말로 신들과 인간들을 즐겁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 연사에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저작거리의 약장수나 광대의 이야기처럼 들어 주면 됩니다. 저는 쓸데없는 고민거리로 학생들을 괴롭히는 선생이 아닙니다. 그저 나 우신에 대한 칭송일 뿐입니다. 나는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로마인들은 나를 스툴티티아(Stultitia)로 불렀고, 희랍인들은 모리아(Moria)라 불렀습니다.

 

여러분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 말고 달리 부를 이름이 있습니까? 내 아버지는 ‘부유’인데 이분이야말로 바로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행복의 섬입니다. 그곳은 아무도 늙지 않고 온갖 꽃들과 약초가 있습니다. 나는 태어나 울지 않고 해맑게 웃었습니다. 나를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가 나를 젖 먹여 키웠습니다. 나를 수행하는 하인들의 이름은 ‘자아도취’ ‘아부’ ‘태만’ ‘환락’ ‘경솔’ ‘음란 호색’이며, 머슴은 ‘광란 축제’와 ‘인사불성’이 있습니다. 나는 이들을 통해 세상만사가 내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고 군주들도 내게 복종하게 합니다.

 

나는 세상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쾌락 없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젖먹이를 좋아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가진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나는 노인들은 내 종 ‘망각’에게 데려갑니다. 그들은 분별없고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두고 ‘노인이 유년을 되찾았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노인이 많은 인생 경험과 매사에 정확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따진다면 누가 그들과 교제하려 하겠습니까? 어리석음이야말로 행복의 근원입니다. 여자들은 어떨까요? 만약 어떤 여자가 현명하다는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두 배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많은 측면에서 남자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모두 어리석음 덕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아이, 어리석은 노인, 어리석은 여자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존재들에게 현자들이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러니 우신(어리석음)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회나 생명도 내가 없다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음이 국가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어리석음을 통해 제국의 관리와 종교와 의회와 법원 등이 유지되어왔습니다. 그러니 ‘인간 세상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어리석음의 독무대라 하겠습니다.’ “시대와 불화하는 지혜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으며, 세태(世態)를 거스르는 처신보다 신중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연극을 살아갑니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저들이 주장하는 완벽한 절대 현자는 짐승 같은 존재입니다. 삶은 고통으로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저지른 악을 보십시오. 누가 세상을 보면 행복해 합니까?

 

“하지만 나 우신은 부분적으로 무지와 더불어, 또는 일부 아둔함을 통해,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의 망각에 힘입어, 때로 행복의 희망을 빌미로, 그러니까 온갖 쾌락들로 꿀을 발라 가며 이런 엄청난 고난 가운데 인생이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고단함을 잊게 합니다. 우리는 다이몬(내면의 목소리를 뜻한다)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연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때 아무런 다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로니아 사람들의 점성술과 희랍 사람들의 경박함이 육백여 개의 학문으로 만들어 인생이 짊어질 십자가의 형벌을 보탰습니다. “실제 문법 하나만으로도 인간에게 형극의 고통을 끊임없이 가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말입니다.”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행복합니다. 자연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지혜를 찾아 골몰하는 자들은 인간들 가운데 행복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음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람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현자들의 혀는 두 개입니다. 하나로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편리한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흰색을 검다 하고, 찬 것을 뜨겁다 하고, ‘진심은 가슴속 깊이 숨겨 둔 채 거짓부렁을 지어내고 합니다.’

 

성직에 있는 사기꾼들은 마법의 주문과 기도문을 달달 외우면 천상에서 예수님의 옆자리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현세에서 쾌락을 누리다 천국에서도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서 꾸민 것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같이 어리석은 행동들이 차고 넘치는 삶은 내내 살아가고 있으나, 성직자들은 이로부터 무언가 이문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음을 기꺼이 허락하며 심지어 조장까지 합니다. 자아도취에 빠진 이들은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예술가들 또한 가장 독특한 자아도취에 빠져 삽니다. 배우, 가수, 변사와 시인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자아도취에게는 아부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자아도취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면, 아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합니다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습니다.” 설교자가 심각한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은 꾸벅거리며 하품하며 싫증을 냅니다. 하지만 그 흔한 꼬부랑 할망구의 옛날이야기가 시작되면 모두 눈을 번쩍 뜹니다. 이렇게 허상 만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완고한 유대 신학자들을 결코 삼단 논법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실천하는 삶에 나타난 이적과 기적의 힘이었습니다. 이교자아 이단자들이 난해한 글에 회심치 않습니다. 교회 학자들이 가진 발군의 말재주는 냉정한 사람마저 격앙시키고, 지독한 혓바닥은 무던한 사람마저 격분케 합니다. 교회 학자들은 스스로의 모습에 취하여 스스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제 노래에 취합니다. 복음서나 바울 서신을 읽는 것은 고사하고 들출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교회 전체를 자신들이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교파와 자기만의 전통을 고집하는 수도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소한 예례나 옷차림, 규칙들을 목숨보다 소중히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커다란 공헌으로 여깁니다. “장차 그날에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오로지 하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였는지를 물으실 텐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든 살 먹은 교회 학자의 이야기를 드려드립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신비를 해명하려 합니다. 예수의 단어가 가진 세 가지 격변화가 삼위일체 신비라고 합니다. 주격 Jesus는 s로 끝나고, 목적격 Jesum은 m으로 끝나고, 여타의 격들은 Jesu이며, 이는 u로 끝납니다. 이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놀라운 서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듣고 있는 청중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추기경들과 교황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들이 사도들처럼 ‘도대체 재산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고 말했다면 추기경들은 그 자리를 기꺼이 버렸을 것입니다. 옛날 사도들이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염려하고 근신하며 평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황들이 예수와 동일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였다면, 이는 누구보다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 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황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교황의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돈으로 자리를 사고 칼과 독약과 온갖 폭력으로 이를 보존하려 합니다. 오늘날 교황들은 수고스러운 것들은 베드로와 바울에게 맡겨두고 넘쳐 나는 여가를 즐기며, 빛나고 즐거운 일을 맡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무섭고 지독한 적은 장사치의 법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억지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불경건한 교황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피로 세워졌으며, 피로 굳건해졌으며, 피로 성장하였으며, 이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자신들이 칼을 들어야 할 것처럼 교황들은 전쟁을 불사합니다.” 그들 곁에는 교황들을 옹오하고 신학적으로 변호해줄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습니다. 법률에 정통하여 그것을 교모하게 피해 정당한 방법이라 말합니다. 교황들 역시 예배를 통해 금전을 부지런히 모아야 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사도들이 해야 했던 돌봄과 긍휼의 사역은 주교들에게 이양합니다. 주교들도 너무 바빠 사제들에게 이양합니다. 사제들은 은밀하게 수많은 이득을 취해야 하므로 그 일은 탁발 수도사들에게 이양합니다. 탁발 수도사들은 이를 양털 깎는 목자들에게 이양합니다. 우신이야 말로 교황들과 사제들을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내가 아니면 이들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지혜는 사람을 소심하게 만드는 바, 결국 지혜로운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와 헛된 희망 가운데 천대받으며 각광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여러분은 보았을 것입니다.” 솔로몬도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이 늘면 근심도 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또한 어리석은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 했으니 나 우신(어리석음)이야말로 사람들에 행복을 주는 장본인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어리석이 하늘에서 축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죄의 용서는 어리석음에서만 주어집니다. 흔히 용서를 구할 때 알고도 저질렀다면 용서 받기 힘듭니다. 그러나 내가 어리석어졌다고 한다면 쉽게 용서받거나 죄의 값은 아주 작아집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저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눅 23:34) 정리하면 ‘기독교는 일종의 어리석음과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며 지혜와는 무관한 종교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적 신앙의 열정에 전적으로 스스로 헌신하는 사람들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이 또 없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재산을 헌납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속임을 당해도 참고, 쾌락을 멀리하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오로지 최후의 날을 고대합니다. 이들은 육적인 것들을 버리고 영적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고통을 불사하고 찾는 행복은 일종의 어리석음과 광기’라고 확신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보이는 재물과 안전을 구한다면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구하고 갈망합니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광기는 커지고 그만큼 행복 또한 더욱 커집니다.” 그들은 하늘의 삶을 열광적으로 사랑하여 자신들의 육체를 소진시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나 우신(어리석음)의 덕분이 아닙니까.

 

이제 여러분이 맺음말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엄청난 언어의 잡동사니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같이 마시고 다 기억하는 놈을 나는 증오한다’고 했죠. 나는 ‘다 기억하는 청중을 증오한다’고 고쳐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잊고 즐겁게 사십시오. 부어라! 마셔라! 나의 우신의 교리에 탁월한 당신이여!

 

3. 나가면서

 

우신예찬은 1511년에 출판되었고,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에라스무스 자신에 의해 수정 증보되었습니다. 에라스뮈스를 최고의 인문학자 반열에 고르게 한 작품입니다. 이곳의 요약에서는 극히 일부만을 인용했지만, 우신예찬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고대의 철학과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고, 응용합니다. 친구인 모어에게 인사하면서 모어 More와 어리석다는 헬라어 모리아 Moria를 비교한 것만으로 충분해 보입니다. 에라스뮈스를 사제가 아닌 인문학자로만 인식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천재적인 작문실력은 읽는 이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신예찬은 출판되자마자 당대 최고의 인문학적 출판물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비록 종교개혁자의 자리에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신학적 소견과 인문학적 소양, 신앙과 믿음에 대한 평신도의 역할 등의 강조는 종교개혁가들이 강조한 것들입니다. 루터를 비롯한 츠빙글리, 칼뱅 등은 인문학적 측면에서 충실한 에라스뮈스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신학적인 부분까지 협력할 수 있었다면 에라스뮈스의 위신은 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우신예찬은 어리석음의 신인 우신이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연설형식입니다. 외형적으로 우신은 현자(지혜로운 자들)의 심각성과 진지함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재미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오히려 마음에 고통을 안겨주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헬라의 쾌락주의자들이었던 에피쿠로스 학자의 풍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진정한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전한 믿음과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입니다. 동일한 어리석음과 광기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세속적인 광기와 탐욕을 가진 자들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광기를 구분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리석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 속에서 어리석은 자들로 자처한 그리스도인들을 진정한 우신(어리석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중반 이후 이어지는 중세교회에 대한 날카롭고 예리한 풍자는 진지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중세 교회가 스스로 버틸 수 없을 만큼 타락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에라스뮈스는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면서 사도들의 사명을 잇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어리석음과 광기이지만 엄연히 타락한 자들의 것과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의 것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앞으로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의 삶과 신앙, 저작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들과 에라스무스를 비교하며 읽는 것도 흥미로워 보입니다. 왜 그가 중세 교회에 안주할 수밖에 없었지, 왜 종교 개혁가들은 에라스뮈스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됩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루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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