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칼뱅,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다.
칼뱅,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다.
De necessitate reformanda Ecclesia
*이 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1. <종교개혁의 필요성>이 나오기까지
종교개혁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읽어야할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칼뱅의 <교회 개혁>이란 책입니다. 이 책은 ‘칼뱅의 종교개혁을 위한 항변서’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왜 종교개혁을 해야만 하는가를 주창하는 칼뱅의 항변서입니다. 루터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살피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책은 왜 종교개혁이 필요하며, 어떤 방식으로 개혁되어야 하는가를 명료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루터에 비하면 늦은 시기의 사람이지만 개혁정신에 있어서는 루터보다 명징하고, 단호했습니다. 또한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기독교 강요>를 펴냄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를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루터의 생애와 저작들을 읽어가다 보면 많은 점에서 독창적이고 깊은 성경적 통찰력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인이 갖는 관념적 성향이 짚게 배어 있습니다. 루터에 의해 촉발된 이신칭의와 성만찬 논쟁은 루터가 아직 로만가톨릭과 종교개혁 사상 어딘가에 걸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마 칼뱅이 아니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칼뱅은 루터의 충직한 제자이면서 루터를 뛰어넘는 진정한 종교 개혁가였습니다. 루터를 루터로 만들어진 사람이 바로 칼뱅이었습니다.
후에 칼뱅의 생애를 다룰 때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유럽은 종교전쟁이 시작됩니다. 당시 종교개혁은 단순한 교회개혁의 수준을 넘어 사회정치적 혼돈을 가져왔습니다. 칼뱅은 모국인 프랑스에서 핍박을 피해 칼뱅은 1536년 제네바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제네바는 아직 교회개혁을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습니다. 결국 칼뱅은 제네바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여 스트라스부르크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부른 마르틴 부처와 함께 새로운 교회 개혁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역의 김지나움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1539년에는 <기독교 강요> 두 번째 라틴어판을 출간합니다. 1540년에는 칼뱅의 주석의 시작인 로마서가 나오게 됩니다. 평신도들을 교육하기 위해 1541년에는 <성만찬 소고>라는 작은 책자도 출판하면서 종교개혁의 터를 다집니다.
칼뱅이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동안 제네바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시작했지만, 주도할만한 사람을 잃어버린 제네바는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라는 끈질길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파렐에게 편지해 다시 칼뱅을 제네바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파렐의 끈질긴 요청과 목회적 양심은 칼뱅을 다시 제네바로 이끌었습니다. 1540년 1월 24일자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뱅은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제 자신의 주인이 제가 아님을 알기에 저는 제 심장을 도살된 것 같은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결국 1542년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제네바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해 버립니다. 황제였던 칼 5세는 제국의 평화와 프랑스와의 임박한 전쟁을 위해 여론을 모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국의 종교지도자들을 모아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개체합니다. 제국의 이익을 위한 회의였기에 제네바에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1차 회의에서 종교개혁을 승인했지만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1529)에서 그것이 번복됩니다. 루터를 따라 제국의 결정에 항거하자 그 때부터 ‘항거자(Protestant)’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1542년 제3차 슈파이어 제국회의가 열리지만 가톨릭과 개신교는 더욱 분열하게 됩니다. 칼 5세는 2년 후인, 1544년 슈파이어(Speyer)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개최하려고 했습니다. 부처는 칼뱅으로 하여금, 제국회의에서 읽히게 될 문서를 작성하도록 요청하게 됩니다. 왜 종교개혁이 필요하고, 종교개혁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를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칼 5세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전쟁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양쪽의 화해를 도모할 생각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개신교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도록 부추기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와 칼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긴급하고, 절박한 것은 육신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43년 칼뱅의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작성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칼뱅의 교회에 대한 진단과 개혁의 절박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김산덕이 옮긴 부흥과개혁사에서 출간된 <교회 개혁>을 참조하여 요약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교회 개혁’은 박건택 교수가 번역한 <칼뱅 소품집1>(크리스천 르네상스)에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책의 목차는 원본에는 없으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역자가 구분하여 붙인 것입니다. 책의 논지에 따라 요약했으며, 중요한 문장이나 필요하다고 판단된 문장은 ‘ ’나 “ ”로 표기하여 직접 인용하였습니다.
2. 책의 요약
“황제폐하시여, 당신께서는 우리 모두가 아주 비참하고 절망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교회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에 관하여, 영예로운 제국의 제후들 및 그 외의 성직자들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이 회의에 우리 모두를 소집하셨습니다” 제가 발언하는 것을 신중하게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 그리고 아주 위험한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어리석다’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저희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 악성 질병에 걸려있는지 어떤지가 아니라 더 이상 치료를 연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가 같은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첫째는 여러 가지 악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가진 치료법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셋째는 왜 더 이상 수수방관 할 수 없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초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기초를 갖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을 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올바른 예배는 이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실 그대로 모든 덕, 의, 거룩, 지혜, 힘, 은혜, 관용, 생명 그리고 구원의 유일한 원천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는가’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의거하여’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제의보다 순종이 낫다고 했습니다.(삼상 15:22) ‘제멋대로의 예배’는 실로 공허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부패시키고, 더 나아가 이것을 완전히 뒤집어 없애버리는 여러 가지 악덕입니다.’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없고 성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또한 조각이나 그림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성인들에게 드리는 숭배(dulia)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latra)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이제는 동정녀 마리아를 다른 성인보다 높여 대숭배라는 단계까지 고안해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할 ‘말씀’으로 폐지했던 제의가 다시 행해지고 있습니다.[이곳에서 제의는 아마도 유대교의 제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참된 예배의 표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배 안에 수많은 제의를 행합니다. 또한 원죄를 인간의 탐욕이나 성욕 같은 문제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무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언약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로 인해 신자들은 끊임없이 불안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의심하고, 또 불안한 양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마적인 공상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힘은 온전히 상실되어 버렸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사라져 버리고, 인간의 구원은 뒤집어 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합니다.(롬 8:1-16) 인간이 고안한 성례들이 교회를 점령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두 개의 예전이 두려운 방식을 오염’되었습니다. 세례를 가치 없는 부가물로 덮이고, 성만은 다양한 부수물로 인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무시무시한 미신’이 생겨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 예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함으로써 회개나 믿음이나 그리스도 그분에 관하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단지 (눈에 보이는) 표징을 진리로 착각하여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감독이나 목사를 임명한 것은 ‘건전한 교리로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이는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직을 대여하고 판매하는 것이 농장을 대여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맡긴 ‘영적인 통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새로운 아니 날조된 통치형태’가 도입되었습니다. 임직자를 세울 때 자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이처럼 많고 짙은 암흑으로 질식되어가고, 종교가 이처럼 많은 불경건한 미신에 의해서 더렵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무서운 모독에 의해서 타락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무시되고, 구속의 은혜가 많은 잘못된 생각으로 은폐되고, 행위에 관하여 파멸적인 확신에 열중한 자들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고, 성례전의 집행이 일부분 상처 받아 균열이 보이며, 일부분 많은 날조에 의하여 첨가되고 부패되었고, 일부분은 억척스런 돈벌이로 모독되어버렸고, 교회의 통치가 완전히 혼란과 황폐 가운데 빠져 목사직에 앉아 있는 자들이 그 무엇보다도 부패한 삶으로 교회를 심하게 멍들이고, 둘째로는 영혼에 대하여 가장 가혹하며 유독한 폭정을 행사하고, 모든 종류의 오류로써 짐승 취급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파멸로 인도했을 때, 이런 때 루터가 나타났고, 또 그를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사람은 어떻게 구원에 이를까요? ‘인간은 죄와 죽음 외에는 어떤 것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외부 즉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와 생명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유의지를 지니고 행동한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의해서 선행을 행한다는 것은 완전 불가능’합니다. 비록 인간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의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그 자신의 의로 그에게 전가해주시는 무상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렇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義)만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의 대적자들은(중세 가톨릭교회) 상죄(santisfactio 가톨릭은 보속으로 번역)를 고안했습니다. 첫단계는 통회이고, 다음은 행위에 둡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열쇠로 교회의 보화가 열리지만 그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적으로 보충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죄는 값없이 용서되며,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모든 것이 지불되었다고 믿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결코 타인의 죄를 상죄하지 못합니다.
성례전
현재 교회는 일곱 개의 예전을 지킵니다. 그러나 그중 다섯 개는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 도입된 의식’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혼을 성례로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전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숨겨진 자비하심을 각인’ 시키고, 하나님의 은사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 보이십니다.
세례 : 우리는 무익하고 미신적인 의혹이 가는 것을 제하고 세례를 시행합니다. 초대교회의 세례는 단순하고 간결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세례에 온갖 부가물을 첨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모독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성례전과 미사 : 주님께서 성만찬은 더렵혀졌을 뿐 아니라 거의 폐지되었습니다. 주님은 떡과 잔을 나누라했지만 잔을 나누지 않습니다. 부조리하고 더렵혀진 ‘희생에 관한 불경건한 허구를’ 제거해야 합니다. 저희는 날조되고 더렵혀진 희생 제의를 버리고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저희는 백성을 위해서 ‘잔의 예식을 부활시켰습니다.’ 화체설 또한 날조된 것입니다. 빵을 보고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 돌려야 하는데, 빵을 숭배하고 안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성찬에 임해야합니다.
교회개혁의 긴급성에 대해
교회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대적자들은 개혁에 대해 관심도 없으며, 발언하는 자들의 입도 막습니다. 건전한 교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논한다고 물서지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그리스도의 국가가 이 세상에서 다시는 일어시지 못하도록 전력을 집중해온 자들의 그리스도의 국가를 고무시키고 발전시키는 원조자가 될 것이라고, 저희가 정말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폐하 및 제후 여러분! 그들이 교회개혁을 진심으로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에게 교회를 맡기는 것은 이리에게 어린양을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호의 영광을 더럽히지 않고, 그분의 나라가 빛나며, 저희를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예배로 인도하기에 틀림없는 유일하며 순수한 교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저희가 전심으로 열심히 노력 하는 것 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황제폐하시며, 당신은 저희 대적자들의 미친 욕망으로 부당하고 잔혹한 짓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인내해온 사실은 인덕과 각별하신 현명함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현재 교회는 말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가 아닙니까? 교회는 오염되었고, 미신에 의해 왜곡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이 모욕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는 교회를 위해 전심전력했습니다. 저희는 양심을 따라 행하며, 성령께서 증언하십니다. 만사가 나쁘게 흘러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거룩한 신앙고백에 충실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는 죽어도 좋다고 서명’했습니다. 저희는 죽음에서도 승리할 것입니다. 죽음으로서 생명에 이르기 때문이 아니라 “저희의 피가 지금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기 위한 씨앗과 같은 것이 되리라는 사실을 저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나가면서
칼뱅이 주장했던 중요한 부문만을 요약 발췌해 보았습니다. 6-9장은 앞서 부분과 중첩되는 부분이기에 극히 일부만을 앞선 내용에 첨부시켰고, 나머지는 넣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점진적으로 다루게 될 내용들이기에 굳이 넣은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곳에서 칼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초대교회가 세우고 행했던 교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오염되지 않았던 순수한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칼뱅이 강조한 교회상은 바른 교리의 선포와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는 더렵혀진 성례를 정결하게하고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온갖 미신과 부산물들로 인해 성례가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왜곡되어 더 이상 은혜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전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인간이 고안한 방식에서 성경이 가르친 대로의 성례로, 사제와 성인들이 차지한 중보자의 자리를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칼뱅은 가장 우선적으로 바른 교리로 돌아가야 하고, 더불어 바른 말씀 선포와 성례전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미 좌초 직전에 놓였기 때문에 개혁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칼뱅의 서언은 현재의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고, 위급한가를 보여줍니다. 칼뱅은 제네바로 다시 돌아갈 때 파렐에게 했던 결단처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준비를 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벌써 5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외침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직 현대교회가 중세교회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징후들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칼뱅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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