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마르틴 루터의 생애(Ⅰ)
[기독교 고전읽기] 마르틴 루터의 생애(Ⅰ)
들어가면서
“내가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을 자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면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오르테가 가세트가 말한 바와 같이 각 세대를 마치 거대한 인간 피라미드에서처럼 이전 세대들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곡예사들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배들과 선조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생애에 관한 전기에 긴 서문을 쓰는 것과 같다.”
종교개혁사를 시작하면서 유스토 곤잘레스가 남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조들이면서 선배들인 종교개혁가들을 배운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으로 우리 자신의 일부를 배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개신교도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종교 개혁가들이야말로 직접적인 영적 선조요, 선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스틴과 폴리갑,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등 초대교회 교부들도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영적 전수자들입니다. 저희들은 그동안 그들의 생애와 저작들을 살펴보면서 초기 기독교의 특성들을 개론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헬라어와 라틴어라는 심연을 건너 우리에게 다가온 책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천년을 지나오면서 교회가 얼마나 성경에서 멀어지고, 왜곡되어 갔는가는 긴 여정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종교 개혁가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종교 개혁가들이 있기 전, 위클리프와 후스 등 종교개혁을 준비하고 터를 닦은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동안 살폈습니다. 루터가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왜 ‘후스와 같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루터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뭔가를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중세 가톨릭의 전승과 위클리프와 후스와 같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의 어깨 위에 올라 선 곡예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보다 시기적으로 절묘하게 떨어진 행운아였습니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부화하지 못한 체 깨진 달걀과 같다면, 루터야 말로 에라스무스가 말한 대로 자신이 품은 알을 부화시킨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껍질을 깨고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마르틴 루터를 사용하셔서 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개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3회에 걸쳐 생애를 약간 자세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칼뱅의 경우는 신학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만, 루터는 그의 생애를 떼어놓고 신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루터의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인 체험을 들여다보면 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또 다른 개혁자였던 츠빙글리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루터교에 남을 수밖에 없었고, 왜 칼뱅이 종교개혁의 신학을 완성해야만 했는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저작들은 생애를 다른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세 번에 걸쳐 생애와 신앙의 여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기 : 종교개혁 이전의 루터(1483-1517)
제1기는 루터가 태어나고 자라온 시기의 몇 가지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종교개혁가로서의 준비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형의 죽음과 수도사로서의 삶, 성경 강해자로 살았던 시절을 살펴봄으로 그가 어떻게 중세교회의 신학에서 벗어나 종교개혁가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제2기 : 종교개혁 시작과 발전(1517-1525)
폭풍처럼 몰아친 그의 생애의 시작점입니다. 95개조를 붙인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시기까지 다룰 것입니다. 이 시기는 루터가 가장 많은 저작물을 쏟아 놓은 시기이기도하며, 그의 신학이 정립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왜 다른 종교 개혁가들과 결별해야 했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해 종교개혁교회가 아닌 루터교로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농민전쟁이 발발하였던 1525년까지 살펴볼 것입니다.
제3기 : 종교개혁 확산과 죽음(1525-1546)
1525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546년까지 살펴볼 것입니다. 루터의 치명적인 약점이자 실수는 1529년에 츠빙글리와 있었던 마르부르크(Marburg)의 실패였습니다. 이로 인해 루터는 루터파로 한정되었고,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의 꿈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루터의 전 생애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루터의 마지막 생애를 살피면서, 그의 업적과 한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독어에 가까운 ‘마르틴 루터’로 호칭했고, 루터의 생애에 관련된 주 참조도서는 헤르만 셀더하위스의 <루터, 루터를 말하다>(세움북스)와 롤란드 베인톤의 <마르틴 루터의 생애>(생명의말씀사)를 참조하였습니다. 직접인용과 간접인용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제1기 : 종교개혁 이전의 루터(1483-1517)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주요 광산 지대였던 만스펠트 근처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비평가들로부터 ‘활화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될 마르틴 루터가 그 아이의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불처럼 타올랐고, 그로 인해 전 유럽은 종교개혁의 불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원래 농부였던 한스 루터는 광산으로 옮겨 일하게 됩니다. 부지런했던 그는 광부 생활 십여년 만에 여러 개의 용광로를 갖게 됩니다. 덕분에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생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루터의 어린 시절은 주변의 아이들에 비해 괜찮은 편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안 분위기는 지나치게 엄하고 경건했습니다. 루터가 후에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차가운 집안 분위기를 회상하는 것을 볼 때 좋은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터 자신은 부친이 가난한 광부였고, 모친은 땔감을 책임져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루터가 묘사한 어린 시절은 과장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부유한 농부 집안 출신의 전도유망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스무살에 동갑이던 마가레터 린데만과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아이제나흐의 중산층 가문 출신이었며, 그녀의 오빠는 법학자였습니다. 한스 루터가 광부로 이직한 것은 아버지의 농장은 남동생이 물려 받았기 때문이며, 당시 만스펠트 지역에서 급성장하던 구리 광산에 눈을 돌렸던 것입니다. 땅속에서 구리를 추출해내는 새로운 기술과 함께 구리 광산은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루터의 부모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구리광산을 사들였고, 열 개 가까이 되는 용광로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처음 이사할 때는 구리 광산 하나를 지도하는 감독자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권한을 갖게되고 7년 후 3개의 구리 제련소와 80헥타르라는 넓은 토지와 농장의 주인이 됩니다.
만스펠트의 작은 도시였던 아이슬레번으로 이주한, 그해(1483년) 11월 10일, 둘째 아들인 마르틴 루터를 낳습니다. 다음 날인 11월 11일 유아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날이 성 마르틴(St, Martin)의 날이었기에 그의 이름은 ‘마르틴’으로 붙여집니다. 루터가 자라던 어린 시절은 어린 아이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손이었고, 비인격적인 대우는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매를 드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스 루터는 유독 자녀들 교육에 관심을 가졌고, 엄하게 다룬 것은 분명합니다.
“부모님은 나를 엄격하게 키웠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무서웠습니다. 내 어머니는 내가 몰로 호두를 먹었다는 이유로 피가 날 때까지 매질을 하였습니다. 이 고집스러운 훈육 때문에 부모님은 나를 결국 수도원에 보냈습니다. 물론 좋은 의도로 그렇게 하셨겠지만 나는 무서웠습니다.”
루터의 어린시절은 당시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루터가 다른 사람에 비히 예민한 성경인 것은 확실하지만, 우울증이나 치료를 요할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7살이 되었을 때, 한스 루터는 그를 만스펠트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 보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인 시대에-심지어 루터의 어머니조차- 라틴어 학교에 간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특별한 아이들만 학교에 갈 수 있었고, 특히 라틴어 학교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라틴어 대가로부터 라틴어를 배운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생활은 엄격했고, 지루했습니다. 루터가 당시의 시절을 악몽처럼 말하는 것은 당시의 학교 체제가 비인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재능을 알고 법률가로 키위기 위해 1501년 루터를 에르푸르트 대학에 보냅니다. 루터의 남생에게는 광산업을 물려주고 자신을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은 촌에 지나지 않았던 곳에서 이만 오천에 이르는 대도시에 도착한 루터는 도시의 낯설고 광대한 풍경에 압도당합니다. 당시 에르푸르트는 이만이 넘는 인구와 35개가 넘는 교회, 11의 수도원이 존재할 만큼 대도시였습니다. 이 대학은 중세 말에 맹위를 떨친 유명론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열정을 가지고 학업에 열중했습니다. 아직 보수적이긴 했지만 이곳도 인문주의 영향 아래 있었고, 학생들은 이성보다는 경험을 중시하고, 전체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신세대적 성향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선생은 루터를 ‘만스펠트에서 온 마르티누스 루더’라고 기록합니다.
대학에 입학자마자 루터의 음악성을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철학적 재능도 탁월하여 그를 아는 어떤 학생은 루터를 ‘잘 훈련된 철학자이며 음아가’라고 평가합니다. 1503년 아니면 그 다음해 부활절에 루터는 단도에 동맥이 찔리는 사고를 당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의사가 치료하고 돌아갔지만 그날 밤에 다시 상처가 터졌고 죽을 것만 같아 마리아에게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것 중의 하나는 루터가 마리아를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루터 선집 3권에는 루터가 마리아를 얼마나 숭배했는지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일부의 학자들은 루터가 죽을 때 그리스도가 아닌 마리아를 의지했다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경건을 지닌 루터였지만 그는 아직 중세의 종교성을 완전히 벗지 못한 절반의 종교개혁가라는 점은 이러한 부분들에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매우 경건한 학생이었으며, 일반 학생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풍류에 빠지지 않을만큼 금욕적 삶에 가까웠습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루터에게 중요한 한 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루터가 대학 도서관에서 성경을 직접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의 한 부분을 읽었고, 성경은 루터를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간간히 성경이 읽혀지기는 했으나 중세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고, 일반들이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이 성경을 강해하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대학은 교부들의 주석들과 신학자들의 저서들이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홀로 성경을 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 알지 못했지만 그의 성경 읽기는 앞으로 자신이 감당해야할 개혁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1502년 9월, 가장 낮은 단계의 학위인 학사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3년 뒤인 1505년 석사 학위까지 마치게 됩니다. 학사 학위를 받으면서 루터는 몇 개의 과목을 맡아 강의를 시작했고,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에 투자합니다.
1505년 5월 19일, 법률가의 수호 성인인 성 이보(St. Ivo)의 날에 루터는 법학부로 옮겨 법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한스 루터는 자신의 아들이 법학부에 들어간 것을 대단히 기뻐했으며, 적지 않은 기대를 했습니다. 루터가 법률을 공부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요구 때문으로 보입니다. 루터는 법률 공부에 대한 회의적이었고, 이것이 바른 선택인지 불안해했습니다. 불과 몇 개월 동안이었지만 루터는 한 가지 법을 수세기 동안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듣는 수업에 흥미를 잃고 맙니다. 학창 생활을 즐기기는 했지만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쯤, 종교성이 강하고 죽음에 대해서 민감했던 루터는 ‘죽음의 무도회’라는 그림으로보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죽음, 죄책, 하나님, 심판 등과 같은 단어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14세기 유럽을 휩쓸며 유럽인구이 절반 가까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흑사병은 그 후에도 끊이지 않고 간간히 일어났습니다. 루터의 동생도 흑사병을 목숨을 잃게 됩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도 흑사병이 돌아 교수 세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합니다. 도시가 죽음의 악취로 인해 두려워 떨었고, 루터도 깊은 두려움 속에 빠져듭니다. 장례식에 참석해 죽은 교수 중 두 명이 죽어가면서 ‘아, 내가 수도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법률학자로 죽는 것보다 성직자로 죽는 것이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6월 말, 루터는 더 이상 법률 공부가 자신에게 맞지 않았다는 것 깨닫게 됩니다. 6월 30일, 루터는 부모님이 계시는 만스펠트로 길을 떠나게 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더 이상 법률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부모를 설득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추측컨대 루터는 자신의 미래를 설명하려했고, 부모들은 결혼을 빌미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게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터와 부모의 합의는 대체로 결렬(決裂) 된 것으로 보입니다. 루터는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를 어깨에 메고 다시 에르푸르트 학교로 되돌아갑니다. 7월 2일, 고향을 떠나 학교 돌아가는 길에서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번개 소리를 듣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다시 한 번 루터 곁으로 번개가 떨어집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 나뒹굴며 죽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이 자신의 목을 꺾어 지옥에 던져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 때 루터는 마리아의 어머니이며, 광부의 수호신인 성 안나에게 기도합니다. “성 안나여! 살려 주소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결국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했고, 자신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학자들은 루터의 번개 맞은 사건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견이 분분합니다. 심지어 평상시 자신이 즐겨 기도하던 마리아가 아닌 안나에게 기도했다는 것도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다급할 때 자신에 익숙한 성인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이 있는 후 30년이 지난 후 회상하듯 이야기하는 것도 약간 미심쩍어 보입니다. 어쩌면 루터는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자 비상대책으로 번개 맞은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꾸며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경건한 성품상 그것이 희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할 것을 볼 때 거짓은 아닌 듯 보입니다. 결국 학교에 도착한 루터는 두 주 동안 학교를 정리하며 입회할 수도원을 찾아나섭니다. 그가 선택한 수도원은 당시 가장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개혁파를 선택하게 됩니다. 친구들과 결별 인사를 나누고 짐을 꾸려 수도원으로 향합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 하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스 루터는 불같이 화를 냈고, 크게 실망합니다. 자신의 거의 모든 열정과 사랑을 쏟아 부은 루터가 부귀와 명예를 얻게 될 자리를 박차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자식 덕을 보며 행복한 노년을 꿈꾸었던 부모로서는 루터의 선택을 달가워할 이유는 분명히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른 두 명의 아들이 죽자 한스는 그때서야 자신이 루터에게 화를 냈던 것을 후회하고 화를 풀게 됩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한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회에 충성하길 원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교회가 가르쳐준 금욕과 순종의 길을 걷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의 무지한 충성처럼, 루터는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고 헌신했던 교회와 수도원을 배반하게 되리라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다른 많은 일보다 먼저 적선하는 것부터 배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적선을 통해 유지되기 때문에 갓들어온 수도사들이 주로 그 일을 맡았습니다. 루터는 수도사에 들어가기 전 친구들과 작은 파티를 하고, 자신의 가진 법률 서적들을 좋은 값에 팔아넘깁니다. 책값은 고스란히 수도원에 넘겼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세상에 죽은 자로 여겼습니다. 동행한 친구들에게 다시는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 말하며 함께 울었습니다. 루터에게 수도원은 폭풍 속에서 번개로 인해 성 안나에게 서원했기 때문만으로 볼 수 없습니다. 루터는 늘 자신의 죄에 대해 고민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수도원 행은 자신의 죄를 씻고자하는 결의이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스승이었던 요한 폰 그레펜슈타인은 루터가 고해성사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죄책과 고뇌를 가지고 나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년 정도 수습기간인 노비티아테(novitiate)기간 동안 언제든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혹할 정도의 수련 기간이었지만 루터는 기꺼이 참았고, 하나님이 은혜가 임하기를 갈망하며 지냈습니다. 1년이 지나자 수도원장에 의해 진행된 기도와 찬송 이후 두건이 달린 흑색 아우구스티누스 성직복을 입게 됩니다. 의복의 교환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루터는 다시 하나님과 마리아, 수도원장에게 절대적 순종과 청빈, 순결한 삶을 맹세합니다. 수도사의 일은 예상외로 복잡하고 분주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 외에도 화장실을 청소하고 탁발(적선)의 일을 겸해야 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싶었지만 다른 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절할 정도의 금욕 생활은 루터가 속한 수도원에서도 별난 존재로 취급받게 됩니다. 루터는 루터나름대로 허술해 보이는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일상적인 일 외에도 루터에게는 강의가 주어집니다. 충분한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자 주말에 몰아서 하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못했습니다. 잠을 줄이고 또 줄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만 5일 동안 자지 못한 날도 있었습니다. 기도를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던 루터에게 기도하지 못한 날이 이어지자 정신적인 압박과 두려움이 커져만 갔습니다. 양심에 속박된 루터는 수도원의 사소한 규칙들도 큰 짐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키려했던 루터는 정해진 금식과 금식 이후 주어지는 음식조차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행위들은 하나님께 잘 보여야한다는 강박이었지만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수도원에서 열정을 가지고 읽었던 성경조차 공로를 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507년 4월 3일, 드디어 에르푸르트 주교좌가 있는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한 달 뒤인 5월 2일 루터는 첫 미사를 집례합니다. 첫 번째 미사집례는 서품 수여만큼 사람들의 환영과함께 성대하게 치러집니다. 루터에게 실망했던 한스 루터는 아들의 첫 미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데려오고, 수도원 주방장에게 적지 않은 돈을 지불했습니다. 아마도 과거의 일을 회개하고 루터와 화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사를 집례하면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할까하는 두려움과 성찬시에 실수할까봐 공포와 불안에 휩싸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루터는 사제에게 미사를 중도에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제는 화를 내며 계속 진행하라고 다그칩니다. 미사를 마치기는 했지만 자신의 미사가 죄인들의 죄를 사할 수 있을지 조차도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즈음에 루터는 다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했고, 롬바르드의 [신학명제 전집]을 배웁니다. 그로인해 루터는 교부들의 문헌에 친숙하게 되었고, 신학을 깊이 공부할 있는 방법론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의 만남을 통해 루터의 대부분의 의혹들이 풀리는 기쁨을 맞습니다. 그러나 슈타우피츠는 보수적이었으며 교황제도에 충성했습니다. 루터의 명석한 두뇌는 곧 빛을 발합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긴 루터는 1509년 3월에 성경학 신학 학위를 받고, 반년 뒤에 신학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2년 동안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다시 비텐베르크로 돌아간 루터는 다시 학업에 정진하게 됩니다. 1510년 에르푸르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충돌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도원에서 일어난 몇 가지 일로 인해 교황에게 보고하기 위해 27세의 나이로 그는 수도원장의 명으로 로마에 파송됩니다.
거룩한 도성 로마. 로마에 도착하여 땅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문안을 드립니다. 거룩한 로마여! 거룩한 순교자들의 피가 이 도시로부터 뚝뚝 떨어져 흘러나오니 참으로 진정 거룩하도다.”
그러나 미사를 참관하자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맙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미사는 경박하고 형편없었으며, 급히 마쳤습니다. 한 시간에 무려 7번의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루터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도성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바벨론이었습니다. 아무 소득도 없이 루터는 다시 되돌아왔고, 성경강해를 맡아 강의하게 됩니다. 드디어 1512년 10월 18-19일에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18일 오후 세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학생들과 교수들과의 논쟁을 통해 검증받습니다. 그때 루터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 이제 루터는 단순한 강해자나 선생이 아니라 박사만이 누릴 수 있는 ‘신학 교수(Lectura in bibla)’라는 직함이 주어집니다. 1513년에는 시편 강의를, 1515년 가을에서 바울의 로마서를 강의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드디어 1516년과 1517년에 갈라디아서를 강의하게 됩니다. 루터는 자신이 바울이 체포 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던 것처럼 자신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터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무언인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의 작은 탑 안에서 예전에 몰아쳤던 천둥과 번개도 아니고, 첫 미사 시에 느꼈던 전율하는 공포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촉감도 없었습니다. 내면의 깊은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과 같았습니다. 시편 22편을 읽을 때, 신약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정확하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안페히퉁(Anfeech-tung)’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배척 받고,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핏방울 같은 땀방울을 흘리셨습니다.(눅 22:44)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렸던 ‘슬픔이 사람(Man of Sorrows)’이셨던 그리스도, 그 고난을 루터는 자신이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루터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공포의 대상이었던 하나님, 그러나 언제나 은혜 주시기를 갈망했던 하나님. 십자가는 자신이 받아야할 저주를 대신 받았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모든 것이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금식이나 고행이 아니라 ‘믿음’뿐이라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의’를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치른 것이었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말씀이 드디어 루터의 가슴에 깊이 부닥쳐 왔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루터의 가슴은 휴화산에서 활화산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불은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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