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 읽기] 칼뱅의 『제네바 제1차 신앙교육서』
칼뱅의 『제네바 제1차 신앙교육서』
1. 『제네바 제1차 신앙교육서』의 시대적 배경과 목적
파렐은 칼뱅을 만나자 곧바로 『제네바 신앙고백서』를 작성합니다. 1536년 11월, 『제네바 신앙고백서』는 시의회에 제출되어 승인을 받게 됩니다. 고백서는 승인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고백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반감이 일었습니다. 파렐과 칼뱅이 가장 먼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된 이유는 제네바가 가톨릭을 벗어나 종교개혁에 동참하기를 작정했다면 가장 먼저 종교개혁에 걸맞은 『신앙고백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신앙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해 초인 1537년 1월 16일,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지침서』를 제출합니다. 『제네바 신앙고백서』가 수월하게 시의회를 통과한 것에 비해 『제네바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지침서』(이후 ‘예배 지침서’)는 격렬한 반대에 부닥칩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성찬을 매주 실시해야 하고, 교회가 교회에 대한 치리를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즉 시의회가 교회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성찬은 일 년에 네 번만 하기로 결정합니다. 『예배 지침서』를 굳이 공개적 문서로 작성한 이유는 믿음이 지성에 의해 보존되고 자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개혁교회만의 예배 형식과 지침을 통해 교리가 보존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1537년 초에 칼뱅은 드디어 『제네바 신앙교육서』를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제네바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음해에 이 책은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고백서와 교육서의 주된 목적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함께 공유함으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뱅은 서문에 『신앙 교육서 혹은 기독교 강요』라는 설명을 붙임으로 그 저작 의도를 명확히 했습니다. 즉 이 책은 교육서인 동시에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강요(綱要)였던 것입니다.
칼뱅은 왜 신앙고백서가 있음에도 신앙교육서를 따로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요? 칼뱅의 일차적 목적은 어느 정도 수준의 교리를 서로 공유함으로 다양한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537년에 제작된 초판은 프랑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한 해 전에 이미 『기독교 강요』(초판)를 출판했던 칼뱅이기에 신앙교육서 작성은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강요』가 자신의 자의대로 출판한 것이라면 제네바 신앙고백서를 제네바의 시민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좀더 명료하게 정리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인 교리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제네바 시의회는 파렐과 칼뱅은 추방하기로 결의하고 72시간 내에 제네바를 떠나도록 합니다. 그 때가 1538년 4월 22일이었습니다. 칼뱅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을 때 신앙고백서는 다시 제출되고 승인을 받게 됩니다. 필자가 인용하는 책은 1538년 바젤에서 라틴어로 사용된 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자의적으로 요약했으며, 직접 인용은 “ ”와 ‘ ’를 사용하였습니다.
2. 『칼뱅의 제1차 신앙교육서』 요약
[종교에 대해] 아무리 야만적인 인간이라도 종교적이 않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창조주를 인정하고 예배하도록 창조된 것이 명백하다. 불경건한 자들은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개념을 지우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는 어디서도 영원불멸을 발견할 수 없다. 참된 종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거짓 종교는 자신들의 마음에 있는 꿈과 광란을 경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력이나 이성을 초월해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역으로부터 우리에게 표현되신다.”
[하나님은 앎과 구원에 대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리석게 자기를 주님보다 높이려 했다. 그로 인해 인간이 가진 모든 영광을 사라졌다. 또한 타락 이후 ‘눈멀고 끝없는 오류에 빠져든 인간의 슬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에 대적’하게 되었다. 타락이후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가 없다. 사람은 이제 죄에서 태어나고 죄를 짓고 죄로 인해 죽게 된다.
[율법과 십계명]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먼저 ‘자기의 율법’을 주셨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한 의이며, ‘여호와의 영원하신 뜻’이다. 첫돌 판에는 하님을 예배하도록 명시했고, 둘째 돌 판에는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의무들을 제시’하고 있다.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법에 반하는 어떤 열망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각 사람에게 그에게 속한 것을 줄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로써 각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것은 그에게 속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한다. 우리 가진 선함과 거룩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되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과거의 모든 모상은 쓸모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림자들을 물러나게 하시는 본체이시다.’
율법은 영생의 계명이다. 계명을 완전히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육적이고 부패한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법에 맞서 격렬하게 싸우고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으므로, 적합한 청자들을 만났더라면 구원을 가져다주었을 율법 자체가 죽음을 야기하는 것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계명의 위반자가 된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롬 11:32)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친절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보여준다. 불신자들은 복음 안에 있는 ‘비범한 은혜를 비웃는다.’ 오직 신자들만이 그리스도를 즐거워한다.
[선택과 예정]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생명으로 예정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껴안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인간은 우둔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의 지성이 조명되고 우리의 마음이 내부에서 확실한 감화에 의해 확고해 진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비록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자신에게 참여하는 자들로 만드신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의 성령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모든 순수함과 순결함에 이르도록 성화시키신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자랑하면서도 그의 성령에 의한 성화가 없는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없는 자들과 완전히 다르게 율법을 사용한다. 이제는 ‘우리가 더욱 사악한 방종에 빠지지 않게 하는 우리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사용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이들은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것을 성화라 한다. “우리는 필멸의 몸이라는 감옥 안에 있는 한, 이러한 중생이 결코 성취될 수 없으므로 심지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회개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 의롭게 여겨지고 영원한 상급이 보상될 수 있다.
[사도신경]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사도신경을 잘 살펴야 한다. 우리는 전능한 아버지며 천지의 창조주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의 고유한 대상’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도록 보내’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체를 입으’심으로 사람이 되셨다.
“그가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가난함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심으로써 자기의 부요함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며, 우리의 필멸성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자기의 불멸성을 우리에게 주시며,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를 하늘로 올리우시기 위함이였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보여 주시며 우리의 불순종을 도말’하셨다. 그리스도는 단 번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만족’이 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시고 범죄자요 행작자로 저주 받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모든 권세를 이기’셨다.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닫혀 있었던 천국의 문을 우리를 위해 열여 놓으셨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거룩한 보편교회와 성도들의 교제를 믿는다. 죄 사함을 믿으며,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주기도문]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주기도문은 여섯 개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세 개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루고, 나머지는 우리 자신의 관심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다.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 권능과 의와 진리와 자비와 같은 그의 탁월함들’을 기억하며 칭송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의 부요함이 자기 백성의 모든 사역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하시고자 자기의 성령에 의해 행하시고 그들을 다스리심’을 말한다. 두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의 부요함이 자기 백성의 모든 사역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하시고자 자기의 성령에 의해 행하시고 그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을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모으시고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며, 사탄의 나라는 ‘완전히 파괴되어 멸망할 것’을 기대한다. 셋째 간구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케 하시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으로부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의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넷째 간구인 일용할 양식을 구함은 ‘우리 자신을 그의 섭리에 의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오늘’이란 단어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만 매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간구는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용서함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우리의 용서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만한 공로를 얻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간구는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적인 세력에 맞서 확고하게 서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유혹을 받지 않도록 구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성례] “성례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가운데 있는 우리 믿음의 훈련으로서 제정되었다. 성례들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하면서 실로 우리의 믿음을 훈련한다.” 우리는 공적으로 고백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일으켜질 때 성례들에 의해 믿음이 훈련된다. “그러므로 성례란 주님이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떠받치시기 위해 우리를 향한 자기의 선하신 뜻을 표상하고 증거하는 데 쓰시는 외적인 표호(sign)이다.” 기독교회는 오직 두 가지 성례인 세례와 성찬만을 인정한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얻게 되는 정결함’과 ‘육신의 죽음’을 뜻한다. “주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은 주로 세례에 의해 재가되었으므로, 우리가 영원한 언약의 공유자들인, 우리의 유아들에게 서례를 베푸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성례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여 주님의 ‘몸과 피에서 참된 교통을 제시’하신다. 성령의 끈으로 충족되어 영적 교통이 이루어진다.
[교회의 목사와 전통에 관해] 주님은 말씀과 성례들을 인간의 사역에 의해 베풀어지기를 원하신다. “순수한 교리로 사람들을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교육하고, 성례들을 거행하며, 거룩함과 삶의 순결에 관한 최고의 모범을 통해 그들을 가르치도록 교회에는 목사가 세워져야 한다.” 복음의 요체는 ‘죄와 사망의 노예들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풀려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말씀의 사역에 전적으로 매여 있다. 그들은 ‘말씀의 청지기로 임명되었’다.
교회의 일은 품위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전 14:40) “그리스인의 모임에서 질서와 예배를 유지해 주는 끈들인 시민적 규례들은 인간적 전통들로 분류되어서는 결코 안 되고, 오히려 사도의 저 규범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거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헛되다. 출교란 공개적인 간음자들, 간통자들, 도둑들, 살인자들, 구두쇠들, 탐욕스러운 자들, 사악한 자들, 다투는 자들, 폭식가들, 술꾼들, 파당을 짓는 자들, 방탕한 자들로, 권고를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을 때 쫓아내야 한다. 통치자들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그들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선을 행하게 하고 악을 제지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롬 13:4) 그러나 통치자들에게 복종할 때, 언제나 한 가지 예외를 두어야 한다. 그들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서 떠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왕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만이 왕 중의 왕이시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하니라(행 5:29)
3. 나가면서
종교개혁 초기에 유난히 많은 『신앙고백서』와 『신앙교육서(Catechism)』가 존재한 이유는 바른 신앙고백과 이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비적 성향이 짙었던 중세 교회는 그로 인해 무지하고 왜곡된 신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은 바른 신앙고백과 교육을 통해 진정한 종교개혁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정두성은 루터의 교리교육의 가치를 세 가지의 긍정적 의미를 소개합니다.
먼저는 복잡한 신학 논쟁의 내용들을 교리교육서를 통해 평신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둘째는 교리교육을 통해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기독교 교리를 다음 세대에 정확히 전달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셋째는 교리교육이 등한시 되었던 시대의 오류를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루터뿐 아니라 칼뱅의 교리교육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1536년에 출판된 『제네바 신앙교육서』는 기독교 강요를 요약하는 수준에서 작성된 것이기에 내용으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지만 어린 학생들이 접하기에는 적합한 형식은 아니었습니다. 1541년 칼뱅이 다시 제네바에 복귀했을 때 『제네바 신앙교육서』는 강요 형식이 아닌 문답 형식으로 바뀌어 다시 출판하게 됩니다. 두번째 『제네바 신앙교육서』가 문답식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칼뱅이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서 3년 동안 목회현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문답형식은 스스로 읽고 이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 우선된 형식입니다. 교사가 묻고 답함으로 바르게 이해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1541년 출판된 『제네바 신앙교육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목사: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지?
어린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2. 목사: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어린이: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이 땅에서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칼뱅의 신앙교육서의 가치는 신학적으로 루터를 너머 완성에 가까운 측면과 이후에 작성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비롯한 다양한 교리 문답의 기초가 됩니다. 칼뱅은 종교개혁 초기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제2의 종교개혁에 발판을 놓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칼뱅의 문헌들을 좀더 살펴볼 것입니다. 루터의 신학이 독일에 한계를 넘어 서지 못했다면, 칼뱅은 제네바를 너머 유럽 전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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