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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 4:1-12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들

샤마임 2019.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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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 4:1-12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들

 

[본문]

 

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주해와 묵상]

 

이제 후반부로 넘어갑니다. 1-3장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변론에 치중했다면 4-5장은 실제적 교훈을 언급합니다. 지금 다룰 1-12까지는 아래와 같은 구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통과 성적 순결, 그리고 형제 사랑을 언급합니다.

 

1. 전통을 지키는 것에 대한 권면(4:1-2)

2. 성적 순결에 대한 권면(4:3-8)

3. 형제 사랑에 관한 권면(4:9-12)

 

1. 전통을 지키는 것에 대한 권면(4:1-2)

 

끝으로(Λοιπν)”

 

끝으로(Λοιπν)”란 말을 우리의 언어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전혀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단어는 이전 한글개역버전처럼 종말로란 단어가 좋아 보입니다. ‘끝으로는 마치 편지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권면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헬라어는 바울이 종종 사용하는 에스카토가 아닌 로이폰(λοιπόν)’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13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범용적 단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르스는 이 단어를 나머지로 번역할 것을 제안합니다. 왜냐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종말로에 뜻이 아닌 남겨진그 무엇의 개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들면 고전 1:16에서는 그 외에는로 사용되었고, 딤후 4:8에서는 후로는으로, 3:14:8에서는 이곳에 비슷한 끝으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이 단어의 뜻은 어느 정해진 시간의 의미가 아니라 사용하고 남겨진, 또는 이후의 어떤 시간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끝으로(Λοιπν)”는 이전의 변론을 마무리하고, 이제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한 표현입니다. 존 스토트도 이 단어가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려는 의도이기 때문에 '종말로'가 아니라 '그리고 이제'로 번역하기를 제언합니다.

 

권면하노니(παρακαλομεν)

 

바울의 첫 번째 권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장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바울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2:4)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 것은 바로 2절에서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너희가 행하는 바라와 연관 지어 보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삶으로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좀더 좁혀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도덕적 규범에 대한 것입니다. 존 스토트 역시 이곳을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존 칼뱅은 이것을 그들의 거룩한 생활에 대한 헌신을 확증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종종 삶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간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종교개혁가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행위에 의한 공로를 부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신학을 정립했습니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사람의 어떤 공로나 행위는 배제시켜야 한다는 교리입니다. 개신교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물론 이신칭의가 잘못되었거나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후에 칼뱅이 강조했던 거듭난 이후 성화를 쉽게 간과하데 있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것이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을 배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칼뱅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의 원리를 잠깐 들어 봅시다.

 

인간 생활의 정리를 위하여 가장 잘 마련된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에 제공한다. 그러나 하늘 교사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그 율법에 제시된 준칙과 부합하도록 더욱 명백한 계획에 따라서 인도하는 것을 좋게 보셨다. 그 계획의 출발점은 신자의 의무에 대한 개념인데, 그 의무는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드리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12:1) 이것이 근거로 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권면이 나온다.(12:2)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별되며 바치어져, 금후로는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명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삶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아 .. 준 것’(2)입니다. 비록 사도들을 통해 준 것이지만, 역시 그리스도의 기원을 갖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내포합니다. 신앙은 지성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삶으로 드러내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열매()를 기뻐하십니다.

 

2. 성적 순결에 대한 권면(4:3-8)

 

데살로니가 교회에 성적 순결에 대한 권면을 준다는 것은 약간 의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도 헬라지역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들은 성적인 부분에 대해 히브리적 사고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거의 금욕적 삶에 가까운 유대적 전통이 차리라 헬라인들에게는 낯설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비성경적 문화에 대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Τοτο γάρ στιν θέλημα τοΘεοῦ)

 

3절은 1-2절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세부적 가르침이 분명합니다. “(θέλημα)”은 곧 거룩함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고, 명령하는 것들을 살펴봅시다.

먼저는 음란을 버려야 합니다.(3절 하)

둘째는 자기의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4)

셋째는 색욕을 다르지 말아야 합니다.(5)

넷째는 분수를 넘어 이웃을 해하지 안흔 것입니다.(6)

 

분석해 보면 네 번째 명령 외에는 모두 성적 순결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신약 성경 전반에서 거룩은 곧 성적 거룩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부르스(F.F Bruce)의 설명을 첨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유대주의에서처럼 부부간의 성적인 결합을 거룩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 이외의 결합은 금지되었다. 이런 기독교 사상은 복음이 처음 전해진 이교 사회에서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결혼 외적인 성적 결합이 묵인되었고, 심지어 어떤 종류의 성적인 결합은 장려되기까지 했다. 남자는 지적 교제를 할 수 있는 한 여자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예제도로 인해서 쉽게 첩을 소유할 수 있었고, 가끔 매춘부를 통해서도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음란이 일상화된 사회, 그리고 정당화된 문화 속에서 음란은 죄다라고 선언하는 방울은 반사회적이며, 반문화적 측면이 강합니다. 바울은 적당히 타협하여 기독교를 확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화와 결별을 요구했고, 철저하게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권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εδέναι καστον μν τὸ ἑαυτοσκεος κτσθαι ν γιασμκατιμῇ,)

 

바울은 남성들의 사회적 음란에 대해 경고한 다음 곧장 아내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아내를 대할 때, 거룩함과 존귀함을 잃지 말아야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함은 좁은 의미에서 합당하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7:2에서 부부의 성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음란을 막기 위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적인 욕구의 대상으로서 남자와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악하다가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점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핵심을 짚어 냅니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 거룩함과 존귀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아내가 아닌 -그릇(σκεος)’이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진노의 그릇이나 긍휼의 그릇또는 택하신 그릇(σκεος, 9:15)’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분에서 사용된 아내(σκεος)’는 부부간의 상호적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기능적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해석해 보면,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대할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대로 대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여성들이 노예처럼 대해지고, 남성들의 비웃음거리로 여겨졌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바울의 요구는 아내로서 정당하게 대하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욕적인 갈망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내에게 찾고, 타락한 세상의 문화 속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남자는 이방인처럼 색욕이나 형제를 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3. 형제 사랑에 관한 권면(4:9-12)

 

세 번째 권면은 형제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서로 사랑’(9)입니다. 자신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탁월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교회 밖의 사람의 부러움과 시기를 샀습니다. 바울은 너희에게 쓸 것이 없’(9)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용히 자기 일을’(11) 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일을 하지 않음으로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자세하게 다루게 될 그릇된 종말론으로 인해 자신의 일을 감당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벗어나 그릇된 종말론에 빠져들게 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3:11)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스스로 모든 것을 처리합니다. 아프거나 불가피한 일이 아닌 이상 타인에게 자신의 일을 떠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아닌 타인에 대해서는 단정히 행하고, 궁핍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가면서

 

4:1-12의 본문은 전혀 다른 세 가지 주제를 다루는 듯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라는 주제로 엮여 있습니다. 전통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거룩을 유지하고, 아내를 대할 때 거룩과 존귀함을 대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일을 떠넘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자신을 책임지는 것에서 시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순결한 삶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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