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3. 2:13-20 교회를 향한 뜨거운 마음
데살로니가전서 3. 2:13-20 교회를 향한 뜨거운 마음
[본문]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기를 원하다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묵상]
본문은 서문에 소개대로 2:13-16과 2:17-20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2장에서 시작된 변증이 3:10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본문은 바울의 변증의 중간 부분에 속합니다. 13-16은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7-20은 앞서 못다한 변증을 이어갑니다.
2. 변증(2:1-3:10)
1) 교회를 향한 진실한 변증(2:1-12)
2) 유대인들의 대적(2:13-16)
3) 데살로니가로 다시 가지 못함에 대한 변론(2:17-20)
3) 디모데를 보낸 이유(3:1-10)
4)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3:11-13)
두 이야기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인들과 동족, 즉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상황을 자세하게 듣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언급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언급은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줄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들이 어려운 상황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17-20까지의 내용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2:13-16을 ‘사자’ 은유로 이어갑니다. 유모(어머니)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사자로 이어가는 스토트의 독특한 이해는 바울의 어떤 수사학적 기법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진행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려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교회의 탁월함은 그들이 복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15절) 부르스는 ‘받을 때에(ἐδέξασθε)’는 “그들 자신의 결단으로 그 메시지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고 해석합니다. ‘받는다’는 뜻의 헬라어 ‘데코마이(δέχομαι)’의 용법을 보면, 마태복음 10:14과 40에서 집에 영접하는 것, 마가복음 10:15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누군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 또는 영접한다는 의미는 섬김과 환영의 뜻과 함께 ‘하나가 되다’ ‘한 가족이 되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영접’의 의미는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의 의미가 매우 강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위법’이란 언급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 10:28)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운명과 살아가야한 한 몸처럼 여긴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러한 태도에대해 사도 바울의 사도직과 연결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조롱하거나 비웃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에 대한 존경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그러한 모습을 듣고 기뻐했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삶이 변화되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 말씀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말씀이 어떻게 그들에게 역사하고 변화 시켰을까요? 바울은 그들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14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이며, 나중은 안디옥과 그 외의 교회들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시작부터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이적과 부흥이 일어나지만 더불어 엄청난 핍박도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바울 자신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 핍박자였음을 기억해 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예수를 믿음으로 핍박을 받은 것처럼 자신들도 예수로 인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즉 피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고 칭찬했습니다.(1:6) 그들의 믿음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환난 속에서도 이겨내야 합니다. 조병수 교수는 하나님이 말씀이 그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는 증거는 그들이 고난 받는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활동함으로써 본받은 자들이 되고, 본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말씀의 활동을 입증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핍박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입니다.(딤후 3:12) 데살로니가 교회의 탁월함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유대인들은 목이 곧고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였고,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대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자기 죄를 항상 채우’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도 예루살렘의 교회들처럼 ‘동일한 고난’(16절)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너희(데살로니가교회)도 우리와 하나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듯, 너희도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는 말씀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갈 4:29)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분다하여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와 선지자’를 묶어 기독교가 유대의 전통 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은 다시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이곳에서 ‘잠시(πρὸς καιρὸν ὥρας)’라는 단어는 바울의 마음속에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기회만 된다면 다시 데살로니가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얼굴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고전 5:3과도 비교가 됩니다.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ἀπορφανισθέντες ἀφ’ ὑμῶν πρὸς καιρὸν ὥρας προσώπῳ οὐ καρδίᾳ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ἐγὼ μὲν γάρ, ἀπὼν τῷ σώματι παρὼν δὲ τῷ πνεύματι
바울을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로 가기를 시도했습니다.(18절) 그러나 사탄이 막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단은 한 존재가 아닌 국가적 형태 또는 군중들의 의해 형성된 여론이나 정치권력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바울 일행이 발을 딛지 못하도록 정치세력과 결탁하거나 야손에게 한 것처럼 황제를 반역했다는 고소를 통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잠깐 바울의 떠남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떠남의 의미
‘떠난다’는 단어 ‘아포르파니조(ἀπορφανίζω)’는 신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고아라는 헬라어 단어인 ‘오르파노스(ὀρφανός)’와 ‘ἀπο’가 합해 만들어진 합성동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ἀφήσω ὑμᾶς ὀρφανούς ἔρχομαι πρὸς) 이 때 사용된 단어가 ‘오르파노스(ὀρφανός)’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부모 없는 상태로 홀로 남겨진 고아와 같은 상태를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않았다’고 부정함으로 ‘너희들은 고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종종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란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어떤 친구나 관계를 상실하는 것”도 등을 말하며, “강제적이면서도 고통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분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로 인해 자녀를 잃은 부모의 심정이 되어, 자녀들의 운명을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가운데 쇠약해진 상태로 지냈던 것입니다. 아직 어린 자녀가 먼 타향에서 홀로 지낸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로서 안절부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의도치 않게 데살로니가를 떠난 이후 그의 마음은 항상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소망이고 기쁨이고 자랑의 면류관이다’라고. 소망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과 그들을 통해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입니다. 기쁨은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확신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바울 일행의 기대감을 말합니다. ‘자랑의 면류관’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선언에 대한 것입니다. 삶과 모든 것을 다 바쳐 복음을 전했던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 즉 전도의 열매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강제적으로 데살로니가교회를 떠나야했습니다. 피난 가운데 자녀의 손을 놓고 잃어버린 것처럼 그들을 떠나야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잊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디모데를 보내 교회의 사정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모습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고, 앞으로 이루어가실 계획을 확신했습니다. 이보다 기쁘고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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