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데살로니가전서 4. 3:1-13 디모데, 복음의 일꾼

샤마임 2019. 7. 2.
반응형

데살로니가전서 4. 3:1-13 디모데, 복음의 일꾼

 

[본문]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해와 묵상]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형언하기 힘들 것입니다. 특히 자식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면 더욱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할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걱정되어 잠을 거의 자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의 끈질길 소요로 인해 정착하지 못하고 쫒겨 다니는 상황이었습니다. 뵈레아로 갔지만 다시 쫒겨나 아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덴에서도 얼마 머물지 못하고 고린도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아덴까지 오고나자 바울은 더 이상 데살로니가교회 소식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동행했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데살로니가에 다녀오도록 부탁을 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머물고 있을 때 디모데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데살로니가교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καταλειφθναι ν θήναις μόνοι,

 

1절은 상당히 논란이 많은 구절입니다. 사도행전과 비교했을 때 상황을 추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지역 인도자들과 함께 아덴에 왔다가 홀로 남겨집니다.(17:14-15) 후에 디모데와 실라가 합류한 것으로 나옵니다.(18:5)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과 실라가 마게도냐로부터왔다는 이야기는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이 아덴과 고린도로 가는 과정 속에서 데살로니가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추론이 본문과 연관시켜 추론할 때 가장 합당해 보입니다.

 

조병수 교수의 추론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음

바울이 아덴에 있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으로 옴

(바울이 속히 오게하라는 명령 행 17:15)

바울과 실라는 아덴에 남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냄

바울이 아덴에 있을 때, 남겨진 실라를 다시 마케도냐의 어느 곳으로 보냄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돌아옴

-시기적으로 실라가 먼저 고린도에 도착함

-후에 디모데가 도착해 보고함, 그 때 우리는 바울과 실라를 말함(살전 3:6)

 

학자들 간의 적지 않은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만이란 단어에 권위를 싣고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만의 헬라어 모노스(μόνος)’는 앞선 머물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머물다는 헬라어 카타레이포(καταλείπω)’버려지다’ ‘(떠나고 뒤에 또는 홀로) 남겨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게 생각하다는 한글성경은 좋다의 개념으로만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최선의 선택또는 여러 가지 여지가 있지만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가진 유도케오(εδοκέω)’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번역을 하자면,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불가피하게 우리만 남겨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들을 너무나 보고 싶고, 걱정이 되어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고 우리는 이곳에 남겨진 것을 선택했다.’의 뜻을 갖게 됩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디모데를 멀러 떠나보내고 우상 숭배가 많연한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교제권으로부터 고립된 채 두 번째로 홀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그의 민감한 영혼은 이 또 다른 호된 시련으로 인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더 이상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 걱정하며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한 번 외로운 시간을 겪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은 자신이 겪을 고충보다는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걱정이 그를 압도해 버린 것입니다. 헨드릭슨의 주장처럼 그것은 사랑의 희생이었습니다. 바울의 결단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목회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길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을 인도하고 먹이고 지도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은 친히 선한 목자가 되어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았습니다. 악한 목자는 자신의 배를 불리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희생 없는 사역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배가 아니라 성도의 목마름과 배고픔과 고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πμψαμεν Τιμθεον, τν δελφν μν κασυνεργν τοθεο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디모데를 보냈고, 다시 보낼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를 굳게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갈 수 있는 상황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보낸 것입니다. 마치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바울을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우리의 형제(τν δελφν μν)’하나님의 일꾼(συνεργν τοθεο)’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의 일꾼에 관련된 다른 표현들

 

형제아볼로 (고전 16:12)

사도실라 (살전 2:7)

돕는 자에라스도 (19:22)

일꾼에바브라 (1:7)

동무빌레몬 (1:17)

수고한 자마리아 (16:6)

좋은 군사디모데 (딤후 2:3)

동료 수감자브드나도 (고전 16:17)

팀동료순두게 (4:2)

 

바울은 디모데를 우리의 형제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어떠한 부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스이 말대로 하나님의 동역자즉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의 사명을 함께 감당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이며, ‘우리가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16:21),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고전 4:17),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2:22)한 자로 소개합니다. 이처럼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거의 분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제 그가 다시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데살로니가고 향합니다. 디모데를 보내는 것은 바울 자신이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디모데가 가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굳게 하고다른 하나는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교회가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3) 요동한다는 뜻은 유혹으로 인해 확신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흔들리는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복음, 즉 말씀으로 무장한 디모데를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게 함위로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할 때 성도는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위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이 세움 받았다고 말합니다.(3)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이미 그들이 받을 환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4)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받으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환난이 닥칠 것임을 반드시 강조해 말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고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14:22)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왜곡되거나 편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아첨이나 속임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받은 것은 일종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며, 환난을 감수해야 하는 심각한 선택의 갈등을 떠안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디모데가 돌아왔을 때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디모데의 손에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들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바울 일행을 보고 싶어한다는 소식도 전해왔습니다. 바울은 이것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데살로니가교회가 주 안에 굳게 섰다는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8) 데살로니가교회는 참으로 옥토였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 삶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교회의 열매들은 바울에게 위뢰가 되었고,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조병수 교수는 바울의 기쁨이 영적인 것이며, 기쁨을 하나님으로 가져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떠한 좋은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9절의 하나님 앞에서13절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 시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라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끌고 갑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바울은 이제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 속에는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하는 바울의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께서 데살로니가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사랑에 넘쳐 마음이 굳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여 흠 없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굳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확고히 뿌리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의 바람이 몰아칠 때 말씀에 뿌리내림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학자들 간 많은 논란이 있는 예수에 대한 경배 문제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제임스 던과 같은 학자들은 예수에 대한 경배가 1세기 말에 사도들과 제자들에 의하며 발전된 신학사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허타도는 초기 문헌에 이미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경배 받았음을 증언합니다.

 

나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복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살아 있는 씨앗은 폭풍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자라납니다. 하지만 죽은 씨앗은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썩어 사라집니다. 생명은 중력을 이겨내야 하고,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납니다. 그것들이 고통과 아픔을 주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자라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란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환난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로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요 일꾼이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위로함으로 데살로니가교회를 굳게 했습니다. 우리는 환난과 고통이 찾아올 때 다른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하고 그 말씀 안에 더욱 뿌리 내려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냄으로 외로움과 버려짐의 고통을 당했지만 유모와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꺼이 디모데와 바울을 교회를 섬기도록 보냈습니다. 바울의 헌신과 결단이 없었다면 데살로니가교회는 더욱 혼란과 고통 속에 빠져들어 갔을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목회자의 자기희생과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보여줍니다.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