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연금술사
[독서일기] 연금술사
2017년 7월 6일
오늘이 이천십칠 년 칠월 육일이다. 지금 밖에는 비가 온다. 그냥 비가 아니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쏟아 붓는다. 내가 어릴 적 여름비가 내리면 무서웠다. 여름비의 양은 하루에 수백 mm까지 내리는 폭우다. 어릴 적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윗마을에서 한 사람이 빗물에 휩쓸려 떠내려왔다. 현식이 집 뒤 둑길에 그 사람을 거적을 씌워 두었다. 요즘처럼 119나 즉각적으로 처리는 때가 아닌지라 하루 온종일 거기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후에 하교할 때 다시 보았으니까. 죽은 사람은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거적이 덮인 사람은 나이가 40대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온몸은 아니고 손만 보았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아니면 더 어릴 때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때만큼 비가 온다. 오전에 천둥과 번개까지 쳤다. 작은방에 불꽃이 튀어 깜짝 놀랐다. 혹시 정전이 되나 싶었는데 다행히 정전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누전 차단기를 내려 강제로 전기를 끊었다 다시 십여 분 전에 비가 그치자 올렸다. 그런데 또 무지막지한 비가 내린다. 무섭도록 말이다. 부엌에서 옥수수 냄새가 여기까지 온다. 양산 아내가 옥수수를 워낙 좋아해 지난주 양산 올라가면서 송산마을 앞에서 산 것이다. 큰 그릇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다시 가져와 오늘 삶고 있다.
어제까지 이틀에 걸쳐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인 <연금술사>를 모두 읽었다. 2001년 12월 1일 1판 1쇄 되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10년 12월 30일 1판 57쇄 판이다. 지금 그러니까 2017년에 인쇄된 책은 대체 몇 쇄나 될까? 아마도 70쇄는 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남아 있다. 나처럼 지금 읽고 있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앞으로 읽고 싶은 독서계획 안에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왜 읽을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읽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나는 코엘료 파울로의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읽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의 책은 읽히지 않았다. 아니 펼치지 않았다. 사 놓고 그냥 책장에 꽂아 둔 체 잊었다. 그런데 이 책도 그랬다. 읽으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놓쳤다. 나만 그럴까? 이 책만 그럴까? 아닐 것이다. 다른 많은 책들도 읽고 싶어 샀는데 잊어버린, 갑자기 읽기 싫어진 책들이 있다. 그러다 어떤 책은 팔리고, 잃어버린다. 그런데 운명처럼 다 손에 잡히는 책이 있다. 바로 이 책처럼 말이다. 아직 <불륜>은 책꽂이에 있다. <연금술사>를 읽고 나니 <불륜>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책을 부른다는 말. 그 말은 맞는 말이다. 비슷한 주제이든지, 같은 저자이든지 비슷한 양식이든지 상관없다. 갑자기 읽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그런데 이상해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찾아보니 1993년 4월에 고려원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동일한 출판사, 동일한 시기에 <꿈을 찾아 떠나는 양치기 소년>이란 책도 보인다. 두 책 모두 <연금술사> 인듯하다. 왜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책을 다른 제목으로 출간했을까? 잘못 저장한 것일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을 더 했다. 그랬더니 고려원에서 1993년 4월 10일 인쇄본으로 염동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가격은 6,500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2010년판이 9천 원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문학동네 판은 최정수가 옮긴 것이다. 두 판을 비교해 보지 않아 같은 번역인지 전혀 다르지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종종 다른 출판사의 책을 가져오면서 동일한 번역이면서도 번역자를 다르게 표기한 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비양심적인 태도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양치기 소년인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아 피라미드까지 가면서 일어나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물을 찾기 전, 만나는 몇 명의 사람들은 그의 여행의 좌표를 알려 준다. 보물은 아이러니하게 자신이 양을 치면서 가끔 쉬었던 허물어진 교회당에 있다. 여행이란 단어, 언어, 깨달음, 자아의 신화, 마음과의 대화 등등 이 책은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목숨을 걸었던 여행의 목적은 바로 자신이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면서 만물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래서 종종 '이 모든 것을 기록하신 그 손을 찾아가 봐.'라고 말한다.
피라미드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서 어떤 부족에게 사로잡혀 연금술사의 망언?으로 바람으로 변한다는 조건을 걸고 삼일의 여유를 얻는다. 마지막 날, 그는 언덕 위로 올라가 바람과 태양과 이야기한다. 사람의 언어가 아니다.
"고요 속에서, 그는 사람과 바람과 해 역시 그 속이 기록해놓은 표지들을 찾고 있으며, 각자의 길을 좇아 단 하나의 에메랄드에 새겨진 그 무엇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지와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고, 겉으로 보기엔 아무 존재 이유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 표지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생겨났는지 사막도 바람도 해도, 그리고 세상사람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다만 그 손만이 그 모든 표지들의 유일한 이유이며, 오직 그 손만이 바다를 사막으로, 사람을 바람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빚을 수 있었다."(244쪽)
개신교인이 읽으면 자치 범신론적 냄새를 맡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문학적 표현이지 저자의 의도는 아니다.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 속에는 종종 성경의 숨겨진 의미들을 캐낸다. 연금술사가 떠나면서 납으로 금을 만들어 자신들을 맞이해준 수도사와 산티아고에게 금을 준다. 산티아고는 언제쯤 그 기술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 연금술사는 금을 주면서 산티아고에게 말한다.
"이것은 내 자아의 신화이지, 그대 자아의 신화가 아닐세. 난 그저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보여주려 했을 뿐이네."(248쪽)
연금술사는 운명이다. 운명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것이다. 보물은 마음이 있는 곳에 있다. 그런데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는 것은 아닐까? 보물은 마음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던가? 소설이 끝나고 작가의 말이 덧붙여 있어 호기심이 일어나 읽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연금술사가 되고 싶어 노력했던 많은 '헛된 시간'을 말한다. 그는 '모든 일에는 결국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라는 옛말을 추억한다.(270쪽) 무엇보다 '영혼의 유배기'라는 구절이 마음을 아프게 조여 온다. '절망의 바다', 스스로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라는 구절 아프게 읽힌다.
여행의 끝은 자신이다. 소설이 시작도 되기 전, 연금술사가 책을 읽는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얼굴을 보다 물에 빠져 죽는다. 숲 속의 요정들이 호수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알고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호수가 요정들에게 한 말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아름다움은 나다. 여행의 끝도 나다. 하나님은 말씀 하신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싶다면, 너부터 사랑하라.'고
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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