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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원어로 읽는 낯선 언어의 세계

샤마임 2019.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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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원어로 읽는 낯선 언어의 세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일 년에 수백 권을 읽어내는 나에게 원어로 읽는다는 것은 이상처럼 아득한 먼 이야기다. 세밀한 부분에서는 원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궁금하지만, 꾸욱~~ 참고 지나가면 될 일이다. 그렇게 만 권이 넘는 책을 읽어 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원어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시지 않는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밀려오는 영어 원서는 이전에 읽어왔던 가벼운 소설과는 너무나 다른 무게감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뒤늦게 미뤄든 영어공부와 성경원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중학교 수준에서 맴도는 영어실력과 십수 년이 지나 다시 시작하는 헬라어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흐릿한 기억만 잔존할 뿐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무식한 나의 실력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좋고, 언젠가는 해야할 공부는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 행복하다. 아내 덕택에 반백살이 다되어 꿈꾸지 못한 호사를 누리고 있다.


헬라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원어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요즘 시작한 갈라디아 주해를 넬슬 알란트 헬라어 성경을 펴놓고 조금씩 일어가면 원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분석이야 워낙 프로그램이 좋아 그리 고민할 일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의지 않고 순수한 텍스트만을 대하기는 참 오랫만인 것 같다. 번역된 영어나 한글로 읽는 것보다 성경 원어를 있는 그대로 읽자 지금까지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성경의 세계가 낯설게 다가온다. 대충 해석이야 하겠지만, 번역되지 않은 체 읽혀지는 헬라어는 영어와 한국어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은혜 너에게 그리고 평안, 부터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바울은 가장 먼저 '은혜가 너희에게 그리고 평안'이 임하기를 말한다. 그 은혜의 출처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된 내용은 번역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순이 너무나 다르다. 어순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읽으니 바울이 무엇을 먼저 말하고 싶어 했는지 희미하게 알 것 같다. 


익숙해지면 무시한다. 이미 안다고 생각해 버린다. 진정 아는 것일까? 피상적 앎에 그칠 때가 많다. 끙끙 앓으며 읽어가는 원어의 세계는 단어 하나하나까지 허투루 대하지 못하게 한다. 마치 글들이 나에게 '네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성경은 나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 말한다. 그렇구나. 내가 성경을 너무나 모르는 구나.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그동안 성경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보게 했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음에도 자세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시 시작하자. 

대구로 이사 오면서 가장 좋은 건 아내와 함께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교회가 보인다. 전도사로 섬기는 아내는 새벽기도를 나가고, 하루 종일 근무하며 저녁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온다.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마음이 무겁다. 그대로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는 즐거움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오늘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아내의 손을 잡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이런 저런 고민할 일들이 있기도 하거나 무엇보다 새벽에 아내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차가운 공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봄내음이 새벽 여명과 함께 코끝을 간지럽힌다. 저벅저벅 걷다보면 어느새 교회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뭘 기도해야 할지 막막하다.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자 그동안 건성으로 했던 기도의 시간이 아까울만큼 기도제목은 산더미를 이룬다.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아직 기도 숙제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김남준 목사는 최근에 출간한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생명의말씀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기도에 대한 그에게 남은 은혜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욕구를 어느 정도 느끼느냐 통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기도의 욕구가 살아있는 사람은 하루 이틀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아 놓지 못해도 마음이 갈급해서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190쪽)


그렇다. 살아있는 자가 목마르다. 죽은 자는 목마르지 않다.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것을 갈망하다. 죄가 지배하는 사람은 기도할 마음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은혜가 정말 필요한 사람은 은혜를 갈망하지 않고, 은혜가 충분한 사람은 더욱 은혜를 갈망하다.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왜 땅에 달란트를 숨겨야 했을까 의아해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이야기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하나님을 찾을 것이며, 그가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모 집사님 내외의 초대로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다. 아내는 사역도 만점이지만 교우들과의 관계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곁에서 조바심에 잔소리만 늘어놓지만, 아내는 생각보다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곁에서 보면 아래는 항상 교인들 걱정이다. 말 하나, 생각하나에도 교인들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있다. 기능적 목사로서 최선? 아닌 최선을 다해왔던 나로서 전심전력으로 사역에 집중하는 아내의 모습은 하나님의 손과 발처럼 헌신적이다. 

어제는 교회에서 돌아와 마음이 상해 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몇 가지 일 때문에 힘들기도 하겠지만 교인들이 받은 상처를 자신의 상처 인양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 흐르듯 그냥 지나치라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한 번은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가슴에 파묻혀 운 적도 있다. 그냥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게 넘어가지 못한다. 교인들이 느낄 아픔을 자기의 것인 양 아파하며 슬퍼한다. 

그런 아내가 어쩔 때는 너무나 낯설다.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사소한 행위들이 헬라어 원문을 대하듯 낯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기 몸 아픈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고, 집에 돌아와 지쳐 쓰러지면서도 좀처럼 게으름을 모른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오늘은 아내가 편한 마음으로 쉬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참 좋다. 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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