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초판 인쇄가 무려 55쇄
2017년 2월 9일
그러니까 어제가 마량 장날이었다. 그저께 아이들은 결석했다. 월요일 부산에서 돌아와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필주가 배가 아프다며 일어나질 않는다. 어차피 가도 공부도 안 하는데 가지 말아야겠다 싶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방에 들어가 자고 말았다. 그렇게 화요일은 보낸 것이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좋은 점도 있다. 애들하고 하루종일 놀 수 있지 않는가. 하기야 방학 동안 얼마나 같이 지냈던가. 이젠 아이들은 마량이나 대덕 놀러 가도 것도 탐탁지가 않는가 보다. 친구가 없으면 어딘들 재미가 있으랴. 삶이란 풍경이 아니라 결국 사람인 것이다.
어제 먹은 것을 불편한 탓인지 4시 40분쯤에 잠이 깼다. 꿈이 불편했다. 속이 불편하니 불편한 꿈을 꾼다. 몸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영육을 일체로 보아도 구약의 히브리 사상이 옳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함께 창조하셨다. 헬라인은 틀렸다. 몸과 마음은 구분할 수 있어도 분리할 수는 없다. 육체를 벗은 것인 자유가 아니다. 그건 어리석은 것이다. 영혼은 육신에 머물 때 참 영혼이 된다.
결국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7시면 일어나야 할 판인데 지금 누워 있어야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았다. 어제 잠깐 읽다 만 공지영의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를 찾았다. 잘 보이지 않아 대신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들었다. 2008년 3월에 오픈하우스에서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은 2016년 8월에서 해냄에서 재판된다. 위녕이란 딸에게 주는 편지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다. 2015년 한겨례출판사에서 <딸에게 주는 레시피>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응원의 2편이 아닐까 싶다.
몇 장을 뒤적거리다. 인쇄 부수를 보고 깜짝 놀랬다. 초판일이 2008년 3월 24일인데 가지고 있는 책은 초판 55쇄다. 2008년 11월 15일 인쇄본이다. 불과 8개월 반만에 55쇄가 인쇄된 것이다. 이게 공지영의 위력인가? 너무 쏠린다. 물론 좋은 책을 사랑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고 몫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한다. 글이야 좋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대박을 칠 만큼 좋은 문장일까? 아니다. 글 잘 쓴다. 내가 봐도 정말 편하고 술술 읽힌다. 그런데 왜 불편할까? 그건 아마도 공지영이란 작가를 시샘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고를 줄 모르는 독자에 대한 서운함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지만, 대부분 독자는 스스로 책을 고를 줄 모른다. 즉 독서가 계획적이지 않다. 출판사는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좋은 책을 분간하는 능력이 없다. 없다는 표현은 읽어 보지 못한 책이 좋은지 나쁜 지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읽어보면 알리라. 그럼 독자들은 어떻게 책을 고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는 저자의 명성. 다른 하나는 지인의 소개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두 가지에 기댄다. 사실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되는 것은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특히 신문은 약하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이슈화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없던 호기심도 발생한다. 읽지 않아도 사둔다. 유행이 뒤지면 안 되니까. 그렇게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공지영의 책은 순전히 저자의 명성이다.
페북에 공지영에 대해 올렸더니 몇 분이 별로라는 이야기를 했다. 조금 놀랬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분도 공지영의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읽은 것이다. 읽고 좋다 안 좋다는 평가한 것이다. 난 아직 공지영의 책이 없다. 이번에 구입한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가 처음이다. 두 권은 ㅎ와 서면 알라딘에서 구입한 것이다. 물론 그전에 <의자놀이>를 사서 읽기는 했지만 이건 공지영의 책으로 넣기는 그렇다. 르포 형식으로 기록된 책으로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를 쓴 엘레나 페란테가 독자를 휘어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탁월한 심리묘사다. 숨겨진, 그러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나 존재하는 무의식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그녀에게 있다. 내가 보기에 공지영의 글에도 그런데 느껴진다. 페란테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음의 그늘을 찾아 읽어준다.
"고통만이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죠."
"가야 할 것은 분명 가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와야 할 것들도 분명히 온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어쩌면 위대한 작가란 보편적 인간 심리를 개체화 시켜 풀어내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고 본다. 위녕이란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인 셈이다. 일부 작가 쏠림 현상에 불평을 하면서도 내가 일반 독자라도 읽고 싶은 것은 피할 수 없다. 이게 초판 55쇄의 비밀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독자를 바보 취급하는 나도 틀렸다. 문제는 저자에게 있을 수도 있다. 형편없는 글로 작가의 대열에 오르고 싶은 허세를 가진 엉터리 작가들 말이다.
위대한 작가는 평범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인간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사소한 풍경을 세밀하게 열거한다. 설명하지 않고 그린다. 잡지 않고 흘려보낸다. 너무나 평범하기에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고, 너무나 세밀하기에 꾸며진 것이라 전제하지 않는다. 보편성? 공감? 그들은 인간을 알고 있다. 표현뿐 아니라 읽는 독자들까지.
어제 대덕 연지리에 가서 조금 걸었던 것이 무리였는지 밤에 조금 무릎이 욱신거렸다. 가끔 두려움이 밀려온다. 마음도 온전치 못한데 몸까지 아프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든다. 최근에 더욱 그런 마음이 심해졌다. 고통 없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 '어느 페이지를 펴도 릴케가 생을 지불하고 얻은 통찰력'이란 말. 정답이다. 아프지 않고 깊이가 없다. 아픈 사람만이 삶의 끈이 처절하리만큼 약하다는 것을 안다.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면 일상이 존귀함을 안다.
몸이 약해진다. 마음은 강해진다. 하나님은 어쩌면 내게 건강을 빼앗고 영혼을 주시려는지 모른다.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희미해진다. 자신도 없다. 그러나 글은 더욱 명료하고, 생의 아픔은 질퍽하게 짓누른다. 나의 고통이 결코 헛되지는 않으리라. 이 땅에 아직도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얼나마 많은가. 나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난 호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호들갑 떨지 말자. 나에게 응원을 보내자.
정현욱 힘내. 오늘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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