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공감하는 교회가 되자
목회칼럼
공감하는 교회가 되자
페이스북이 대세다.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고지를 점령했던 시절이 엇그제 같은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전세는 바뀌어 SNS(Social Networking Services)가 온라인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6년 전 어떤 분의 책을 읽으면서 이젠 SNS(Social Networking Services)시대가 될 것이다고 예언한 것을 보았다. 내심 과연 그럴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 책이 나온지 불과 2년 후에 싸이월드는 몰락해가고 트위트가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페이스북도 뒷따라 오기 시작했다. 불과이다. 불과 몇 년 만에 온라인의 주도권이 바뀐 것이다. SNS 시대가 되면서 글이 이렇게 바꿨다.
긴 글 → 짧은 글
정보중심 → 감정중심
일방적 글 → 쌍방향 소통글
긴 시간 → 짧은 시간
데스크톱 → 휴대기기(모바일, 탭)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즉시 결과를 도출하고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더 이상 인내심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함께 만들어 냈다.
SNS 시대가 되면서 많은 변화들이 일기 시작했다.SNS의 파급효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 넘어 정치에 적극적으로 사용 되기도 한다. 아직 일반인들은 SNS가 무엇인지 낌새도 못채는 사이 시대를 읽는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번에 불거진 국정원 불법 SNS를 통한 선거 운동이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좋아요!
페이스북을 보면 "좋아요!"라는 버튼이 있다. 좋아요 버튼은 글쓴이의 인맥과 공감능력을 보여주는 표시다. 어떤 글에는 좋아요 클릭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반면 어떤 글은 좋아요가 수만번이 일어나기도 한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
버튼에 클릭을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페친(페이스북친구)로 있는 김병년 목사님의 글을 314명이 좋아요를 클릭했고, 공유하기를 2번 했다. 일반인이 좋아요를 50개 이상 받기는 힘들다. 김병년 목사님의 공신력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뜻이고,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자도 김병년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좋은 글이란 뜻이다.
왜 좋아요를 클릭하는가?
1. 아는 사람이라 응원해 주고 싶어서.
그가 쓴 내용과는 그닥 상관은 없지만 그를 믿기에 그를 응원해 주고 싶어서이다.
2. 좋은 내용이라서.
좋아요를 클릭하는 이유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의견과 일치한다. 는 뜻이지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공감을 얻은 것이다.
3. 도움이 되어서.
내가 좋아요 자주하는 내용을 보면 책소개, 독서법, 공부법, 감동적인 글이다. 그 중에서 책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공유하기를 하거나 좋아를 클릭하여 동참한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도움을 주라 그러면 클릭이 일어날 것이다.
4. 재미 Fun
설명이 필요 없다.
5. 본 받고 싶은 사람이나 이야기
오프라 윈프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이다. 청소년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간디도 그렇고, 톨스토이고 드렇다. 좋은 롤모델이 있다면 소개하고 싶어 좋아요를 클릭한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따라 좋아요 클릭 이유를 찾아 보았다. 이것을 다시 묶어 보면 나와 인맥으로 만들어진 관계이거나 내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결국 한 가지로 묶으면 나에게 도움을 주고 내게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이다. 세상의 모든 중심은 '나'이다. 프로타고라스가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라 하지만 더 나아가 '나이다.
공감의 의미를 더 싶이 생각해보자.
-공감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공감은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나의 처지로 생각하여 마음을 일치 시키는 것이다. 역지사지란 사저성어처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주고, 그 사람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 공감의 원리라 할 것이다. 예수님도 공생애 동안 목자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의 입장을 공감하신 것이다. 맹자의 사단설에 측은지심이 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뜻이다.
-공감은 나를 버려야 한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버리고 '그(녀)'가 되어야 한다. 그의 입장, 그의 생각,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요할 때 공감할 수 있다. 알기 전에 판단해 버린다면 공감을 불가능하다. 공감하지 못하면 소통할 수 없고, 소통하지 못하면 오해과 편견이 일어난다. 결국 공감은 나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의 생각과 입장에서 그를 판단하고 비판한다면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거부하고 배제한다. 내가 먼저 나를 버리고 상대편을 수용할 때 그도 나를 수용한다.
-공감은 그를 위할 때 더욱 강해진다.
에머슨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어떤가. 위대한 리더는 철저한 헌신의 사람이다. 리더가 군림하는 시대는 갔다. 아니 없었다. 수많은 추종자를 이끄는 이는 그만큼의 헌신의 대가를 지불한 사람이다. 공감도 그렇다.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 공감하는 사람은 많아진다.
교회가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그만큼 이기적이란 뜻은 아닐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추종자를 얻으려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악해졌다고 말하지 말자. 세상이 무지해서 그런다고 둘러대지 말자. 세상은 고립되어 있고, 소통을 원한다. 그들은 악하지만 선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교회가 그들의 공감을 더이상 얻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소통의 능력을 상실한 현대 교회를 보며, 다시 한 번 공감이 얼마나 중요하진 새삼 깨닫는다. 만약 교회마다 좋아요 버튼이 있다면 몇 분이 클릭해 줄까.
공감을 얻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의 입장을 강제주입하기를 멈추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필요을 채워 주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 일방적으로 말을 한다. 듣기를 거부한다. 여전히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설득의 법칙에 7:3이 있다. 먼저 7를 듣고 후에 3을 말하는 것이다. 그 때 최적의 효과가 온다. 그러나 교회는 0:10의 법칙을 이용한다. 혼자서 말하고 아무 것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교회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공감을 얻는 방법을 정리해 보자.
1. 먼저 듣는다. 충분히
2. 그들의 욕구를 파악한다.
3. 그들이 욕구를 채워준다.
4. 복음을 전한다. 일치된 삶과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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